윗집에 중학교 동창이 살고 있었다
4편 : https://brunch.co.kr/@sosim-in/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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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내려온 뒤 한 달 정도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잠만 잤다. 좀이 쑤셔왔지만 그렇다고 딱히 뭘 해야 할지도 몰라 계속 누워 있었다. 평생 올 것 같지 않던 30살의 문턱은 이미 넘은 지 오래다. 신입지원은 내 쪽에서 민망해 못하겠고 그렇다고 경력지원을 하기엔 전 회사에서 배운 것도 없이 잡무만 했다. 마지막으로 1년만 정신 차리고 다시 공시 준비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그 개미지옥으로 들어갈 순 없다. 그러다 문득 한 달 전 현지가 말해줬던 장래희망 얘기가 떠올랐다. 떡볶이장사라... 그러고 보니 서울에는 부산에서 파는 물떡이라든지 김밥튀김을 파는 곳이 없어서 장사를 하면 잘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장사라는 게 어디 쉬운가. 공시생 시절 노량진 골목에 희망을 품고 들어왔다 절망을 업고 떠난 자영업자들을 수 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반대사례도 분명히 존재했다. 흔히 말하는 대박을 치고 골목골목마다 2호점, 3호점 확장하는 가게도 제법 있었다.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의 다툼이 일어났다. 한쪽은 “네 까짓 게 무슨 장사?”, 다른 한쪽은 “너도 할 수 있어. 시도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라고 속삭였다. 어느 쪽이 천사인지는 모르겠으나 뭐가 됐든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니 무작정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며칠 내내 떡볶이만 먹으러 다녔다. 딱히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몸이라도 좀 움직여봐야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먼저 옛날에 먹었던 평양할머니 분식과 최대한 비슷한 맛이 나는 곳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그러나 평양할머니의 맛을 찾는 건 쉽지 않았는데 사실 그때의 맛 자체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고 또 기성제품 쓰는 곳이 많아서 그런지 가게들마다 맛이 비슷비슷했다. 그렇게 2주를 돌아다닌 끝에 근처 대학가에서 마음에 드는 한 곳을 발견했다. 주인아주머니에게 무작정 무급으로 일할테니 레시피 좀 알려달라고 졸랐다. 아주머니는 자신도 눈대중으로 하는 거라 정확한 계량은 없으니 보고 알아서 익힐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또 가게 운영은 취미로 하는 거라 급여를 줄 순 없고 대신 분식만은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다음 날부터 바로 분식집으로 출근했다. 4개월 간 매일같이 출근하다 보니 웬만한 건 다 익힐 수 있었고 어묵국물의 비밀은 조미료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슬슬 다음 스텝이 필요하던 차에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청년푸드트럭 지원사업'이라는 홍보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훑어보니 결격사유는 없는 것 같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지원서를 넣었더니 이게 웬 걸. 복지과에서 신분증과 문서를 작성하여 관련 부서로 오라고 했다. 나는 거짓과 과장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문서뭉치를 가방에 넣은 뒤 시청으로 향했다. 번호표를 뽑고 빼먹은 문서는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데 순번 표시기에 내 번호가 띵동-하고 떠올랐다. 황급히 서류들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부푼 마음으로 창구에 앉았는데 투명한 아크릴 건너에 앉아있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엔 잔털하나 없이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소희가 앉아있었다. 둘 다 눈이 동그래졌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아크릴 밑으로 작은 쪽지를 건넸다.
'곧 점심시간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커피 한잔 하자.'
소희와 나는 시청 건물 밖 작은 벤치에 앉아 어색함과 반가움을 나눴다. 소희는 작년에 결혼식을 올리고 지금은 임신 4개월 차라고 했다. 결혼식 때 연락 줬으면 축하해 주러 갔을 거라고 하자 소희는 말이라도 고맙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중고등학교 때 가세가 기울어 전학을 자주 다녔고 그 때문에 깊이 사귄 친구가 없어 초대할 사람이 많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너 전학 간지도 몰랐네."
"2학년 때 갔잖아! 그것도 몰랐어?"
소희가 정색을 하며 쳐다봤다.
"하긴, 넌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었으니까 나한텐 별 관심 없었겠지."
"누구 말하는 거야?"
"걔 있잖아. 나랑 비슷하다고 했던 애. 현지였나?"
"나 걔 좋아한 적 없는데?"
"그럼 혹시 나?"
"뭐래. 둘 다 안 좋아했거든?"
"그래?"
민망했는지 작게 웃던 소희는 손가락으로 흡연구역을 가리켰다.
"저기 담배 피우고 있는 사람이 남편인데 점심 같이 할래? 남편도 여기서 일하거든."
배가 고프긴 했지만 조금 불편한 자리가 될 것 같아 조심히 거절했다. 직장동료들이 겹쳐 축의금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불평 아닌 불평을 마지막으로 소희와의 짧은 만남은 마무리 됐다.
한 달 뒤 청년푸드트럭사업 지원을 받게 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소희의 입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서류를 내러 간 김에 감사인사를 전하려고 했으나 소희는 창구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직원에게 준비해 온 서류 일체를 제출했다. 중년의 남자공무원은 초기사업지원금의 일정 금액이 들어있는 선불카드와 자동차 키를 건네주며 주의해야 할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며칠 간의 준비를 끝내고 허가받은 광안리 바닷가 근처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배정받은 자리에 흰색 도료로 푸드트럭 크기만큼의 안내선이 그어져 있었고 연석에는 푸드트럭 번호가 락카칠 되어 있었다. 고맙게도 초기에는 예전 사장님에게 요리기구와 식재료 등 여러 가지를 지원받았다. 사장님은 어린 청년이 기특하다며 인심 좋은 덕담도 잊지 않았다. 노하우가 쌓이면서 장사의 맛을 조금씩 알게 됐는데 업으로 삼아도 왠지 보람차고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 서울에서 장사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선 위치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노량진 먹자골목으로 정했다. 거기라면 유동인구도 많고 학생들이 많아서 장사하기도 좋을 것이다. 그다음은 나만의 무기가 필요했는데 앞서 말했듯 서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물떡과 김밥튀김, 그리고 닭발을 메인으로 잡았다. 닭발은 흔히들 많이 먹는 매운 닭발이 아니라 평양할머니의 간장을 베이스로 한 달달한 닭발이었다. 문제는 간장소스를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연구가 좀 필요한 부분이었는데, 손님들에게 무료로 시식을 부탁한 뒤 피드백을 통해 그럴듯한 간장닭발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푸드트럭을 반납했다. 적자만 보지 말자며 시작했지만 그래도 달에 직장인 월급 정도는 꼬박꼬박 벌 수 있었다. 사업보고서를 들고 복지과를 찾았으나 이번에도 소희는 보이지 않았다. 창구직원에게 물어보니 육아휴직 중이라는 답을 받았다.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은 마음에 소희 연락처를 받을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중학교 동창이라는 점도 어필해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창구직원은 서류를 몇 장 넘겨보더니 청년푸드트럭사업 지원담당자를 창구로 불렀다. 담당자는 보고서를 읽고 난 뒤 지원은 부산에서 받고 장사는 서울에서 하는 게 이치에 어긋난다며 굳이 서울에서 장사를 해야겠냐고 나무라듯 말했다. 맞는 말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부산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원한다면 좋은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는 담당자에게 거듭 사죄를 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태 모은 돈과 부모님의 지원, 그리고 대출을 통해 노량진 먹자골목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는 내가 공시생활 할 때부터 파리 날리던 곳 중 한 곳이었는데 그 덕에, 주인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시세보다 조금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장사는 걱정이 무색할 만큼 순조로웠다. 예상한 대로 물떡과 김밥튀김이 잘 나갔으며 손님들에게 어묵국물이 시원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생각보다 닭발은 많이 팔리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생소한 탓인 듯했다. 그래서 부산에서 했던 것처럼 시식해 보라고 한 두 개씩 무료로 나눠 드리곤 했는데 이게 입소문을 탔는지 어느 유튜버가 와서 촬영문의를 했던 적도 있다.
노량진 생활에도 익숙해져 갈 때쯤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재료손질을 하며 좋아하는 유튜버 영상을 라디오처럼 듣고 있었다. 유튜버는 어느 인플루언서가 폭행사건에 연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서울 모 빌라에서 층간소음과 주차문제로 시비가 붙어 폭행사건이 발생했는데 자동차 블랙박스에 영상이 찍혀 인터넷상에 유포가 되었고 알고 보니 인플루언서였다는 것이다. 가해자 측 여성은 문신 때문에 신분이 특정되었고 여성복 및 애견의류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항상 역시나로 귀결된다. 그 인플루언서는 다름 아닌 현지였다. 물론 현지가 직접적으로 가해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됐든 가해자 측이었기 때문에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영상이 퍼지면서 현지의 얼굴 역시 공개가 되었다. 원본은 올라온 지 1시간 만에 삭제되고 모자이크 된 영상이 올라왔지만 이미 현지의 얼굴은 커뮤니티 이곳저곳에 수배전단처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커뮤니티에는 현지에 관한 글, 특히 학창 시절에 대한 얘기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동창이라며 인증사진 몇 장과 수많은 글이 올라왔는데 그중 몇 개는 누가 썼는지 알만한 것도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과장된 글도 많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국 현지는 SNS 계정과 쇼핑몰을 모두 닫았다.
만약 신이 인생을 되돌릴 수 있는 티켓 한 장을 준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지에게 줄 것이다. 나야 돌아간다 해도 변변찮은 삶이었겠지만 현지는 아니다. 창수가 없는 현지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문득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창수의 근황이 궁금해져서 SNS에 들어가 봤다.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여전히 수려한 외모와 농식품부 장관에게서 받은 젊은 농업인 표창장이었다. SNS를 차근차근 살펴보니 창수는 군 제대 후 김해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온라인판매로 체급을 키운 케이스였다. 판매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대문짝만 하게 '믿고 먹을 수 있는 착한 우리 농산물만 판매합니다.'라고 적혀있었고 텍스트 뒤로는 허접스러운 홍보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만든, 30만 원 받으면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조악한 퀄리티의 영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