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집에 중학교 동창이 살고 있었다
5편 : https://brunch.co.kr/@sosim-in/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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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부터 내린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빗소리가 듣기 좋아 가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장사를 하고 나서부터는 비 오는 날이 좋아졌다. 왠지 모르게 비 오는 날은 손님이 많기 때문이다. 아마 나의 특제어묵국물이 비와 궁합이 잘 맞는 듯했다.
재료손질을 하기 전 전화가 왔다. 거래처 중 한 곳이겠거니 싶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현지의 전화였다. 방금 해외에서 돌아왔다는 현지는 갈 곳도 믿을 사람도 없다고 했다. 재료손질 때문에 통화를 오래 할 순 없으니 일단 가게 주소를 알려 주고 오라고 했다.
장사 준비가 끝나갈 때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를 끌고 현지가 가게로 왔다. 비에 젖은 머리 때문인지 현지는 처량해 보였다. 나는 얼른 수건을 갖다 주고 믹스커피를 한 잔 타줬다. 커피를 받아 든 현지는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하고 가게 안을 살폈다.
"결국 하는구나 떡볶이장사?"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떡볶이장사가 꿈이라더니. 꿈을 이룬 거네?”
현지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꿈이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했다. 분명 초등학생 때 생각했던 떡볶이장사는 적어도 이런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뭐. 그나저나 괜찮은 거야? 어떻게 지냈어?”
현지는 그 일이 터지고 나서 남자친구와 함께 필리핀으로 갔다고 했다. 다행히 남자친구의 선배가 필리핀에 살고 있어서 비자도 해결해 주고 집도 구해줘 정착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가본 카지노에 중독된 남자친구는 들고 있던 돈 모두를 탕진하고 급기야 현지 돈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칼까지 들고 협박하는 남자친구에게 대부분의 돈을 빼앗긴 현지는 남자친구가 카지노에 간 틈에 한국으로 도망 왔다고 했다.
말하는 내내 현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우선 뭐라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배는 안 고파? 떡볶이 좀 먹을래?"
현지는 격하게 얼굴을 끄덕였다. 메뉴 전반을 조금씩 담아주니 배가 고팠는지 부지런히 먹었다. 한참을 열심히 먹던 현지는 젓가락을 탁하고 내려놓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이 타투, 내가 왜 했는지 알아?"
현지는 왼쪽 손목에 한 타투를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왜 했는데?"
"수학여행에서 그 사건 있고 나서 죽으려고 손목 그었거든. 상처가 얕았는지 운이 좋았는지 눈 떠보니 응급실이더라. 그 뒤로 습관적으로 손목을 긋게 되더라고. 왠지 피를 봐야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어서. 근데 엄마가 손목 흉터를 보더니 이게 다 낙인이라고, 이렇게는 한국에서 못 살 거라고 했어. 취직도 못할 거고 사회생활도 힘들 거라고. 그리고는 한참 혼자 뭘 검색하시더니 갑자기 타투를 하자는 거야. 나랑 증상이 비슷한데 타투하고 나서 호전된 사람이 있다면서. 그렇게 엄마 손에 끌려서 반강제로 타투를 하게 됐는데 내가 너무 울고불고하니까 타투해 주시는 분이 부적이라고 생각하라더라고. 타투를 하면 그게 날 지켜줄 거고 앞으로 손목 긋는 일도 없을 거라고. 근데 신기하게 타투를 하고 나서부터 손목 긋고 싶은 욕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어. 그때부터 진짜 부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아이러니하게 타투 때문에 신상이 털려서 말이야. 결국 또 다른 낙인이 된 셈이지."
현지는 말하는 동안 왼쪽 손목의 타투를 계속 어루만졌다. 타투 위로 현지의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옆으로 가 조용히 안아주자 현지는 조금씩 소리 내어 울다가 이내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진정됐는지 현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3년 전인가? 소희한테 DM 왔었어. 너 만났었다고 그러던데?"
"부산 내려갔을 때 어쩌다가 한번 봤어."
"소희는 잘 지내?"
"잘 지내는 것 같았어. 옛날보단 좀 차분해졌더라."
"무슨 일 하고 있었어? 옛날엔 요리사 할 거라고 했었는데."
"공무원 하고 있더라고."
"그래? 좀 의외네."
현지는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중학교 1학년 때 소희와 있었던 시답잖은 에피소드를 몇 개 얘기해 주었다.
"앞으론 어떻게 하려고?"
현지의 얘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 여기 노량진이니까 나도 공시 준비 한번 해볼까? 너랑 소희처럼."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내보이며 말했다.
현지의 생기 없는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돈도, 기댈 곳도 없는 이 친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묘하게도 그녀의 처분이 나에게 달려 있으며 그녀 또한 나의 처분에 아무 말 없이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우선 그녀에게 시간을 좀 벌어주기로 했다. 근처 고시텔로 데리고 가 한 달 치를 결제해 주고 생필품 사라고 50만 원을 이체해 줬다. 생각해 보면 현지 덕에 떡볶이 장사를 시작해 먹고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만 원한다면 자립할 때까지 지원해 줄 용의도 있었다. 현지는 내 행동에 별다른 반응 없이 있다가 장사 때문에 가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조용하게 고맙다고 말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고시원을 나왔다. 가게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착잡했다. 우산이 있었지만 쓰고 싶지 않아 비를 맞으며 터벅터벅 걸었다. 가게에 도착한 뒤에는 생각 없이 떡볶이만 저어댔다. 첫 손님이 올 때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있고 싶었다. 그냥 오늘만큼은 손님이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10분쯤 지났을까. 단골인 손님이 가게를 방문했다. 그는 추측건대 가게 앞 골목 고시원에 사는 일용직노동자다. 이 손님은 비 오는 날 방문이 잦았다.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은 일 잡기가 힘들기 때문에 허탕을 치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기 전 허기진 배를 달래러 온 것 같았다.
"국물이 평소 같지 않네요."
항상 말없이 먹고 가던 사람이 웬일인가 싶어 우선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일이 많아서 조리과정에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잘 먹었습니다."
손님은 그냥 가시라고 말씀드렸음에도 한사코 3천 원을 올려두고 가셨다. 손님이 가고 난 뒤 음식 맛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이런 불량품들을 현지는 아무 말 없이 먹었던 건가. 갈고닦은 나의 실력을 오해받을 순 없다. 나중에 다시 만들어 고시원으로 가져다줘야겠다.
일단 가게 문을 닫고 팻말을 open에서 close로 바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분도 꿀꿀한데 술이나 마시고 한숨 자고 일어날 요량이었다. 그나마 튀김은 맛이 괜찮아서 안주삼아 먹을 것만 조금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폐기했다. 열린 창문 틈으로 타닥타닥 빗방울이 새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날 때까지 계속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니 주위는 온통 깜깜했다. 과음 때문인지 알람을 듣지 못했고 오늘 장사는 공친 셈이 됐다. 문 밖에는 아침에 잠시 봤던 고시원 할머니가 주름 가득한 얼굴을 가게 문에 바짝 대고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자 그녀는 맞게 찾아와서 다행이라며 쪽지 하나를 건넸다. 쪽지에는 '해피 찾으러 간다고 전해주세요. -현지-’라고 적혀 있었고 우측 하단에는 내 가게 주소가 적혀있었다.
해피? 예전에 키우던 그 노견 말하는 건가?
할머니는 다짜고짜 입주 첫날부터 이러는 게 어딨냐며 환불은 절대 안 된다고 성을 냈다. 머리가 아파왔다. 우선 환불은 필요 없으니 진정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혹시 방 안을 확인해 봤냐고 물어보니 마스터키는 있지만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고 했다. 작년에 에어컨 공사 때문에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신고당한 적이 있다면서. 어찌 됐든 방 안에서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고 할머니는 덧붙였다. 짐 같은 게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우선 현지 방에 가보기로 했다. 고시원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계속 현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 좀 해달라고 문자를 보내려는데 빗물이 자꾸 액정에 떨어져 입력이 잘 되지 않았다. 고시원 도착 후 할머니에게 키를 건네받고 현지가 쓰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에서 바닐라 향이 은은하게 느껴졌다. 현지의 흔적으로는 시장에서 산 것 같은 베개와 빈 맥주 캔이 전부였다.
갑자기 눕고 싶어졌다. 생각이란 걸 멈추고 싶었다. 잠이라도 들면 당장은 그게 무엇이든 회피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낮잠 따윈 안 잤을 텐데. 현지는 어딜 간 걸까. 해피라는 노견이 아직까지 살아있긴 한 걸까. 잠깐만.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게 아닐까? 나쁜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고 혹은 필리핀에 있다던 남자친구가 잡으러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찰에 실종신고라도 해야 하나? 우선 뭐라도 해야 한다. 옛날처럼 방관할 수는 없다.
나는 112에 전화를 걸어 실종신고를 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는 경찰관의 물음에 오늘 낮이라고 답하자 경찰관은 "오늘 낮이요?"하고 되묻고는 오늘 낮까지 위치 확인이 된 사람을 실종신고 하기에는 곤란하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답답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처한 상황과 과거의 일까지 모두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급한 대로 그 사람이 연락도 받지 않고 자살의 가능성도 아주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우선 실종신고 하려는 사람 신상과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현지의 이름과 나이, 마지막 행적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자 경찰관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1분쯤 지나 경찰관은
"김현지 씨 전화받으시는데요? 실종신고 들어왔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네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내 전화 수십 통을 안 받던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고?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어쩌면 현지는 경찰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걸 수도 있다. 자살하려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자살할 예정입니까?”하고 물으면 “그렇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위력에 의해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한 걸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가 현지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애초에 본인 확인은 제대로 한 건가?
그때 갑자기 예전에 현지가 설치해 준 위치확인 앱이 생각났다. 위치 확인만 되면 지금 당장 달려가 내가 직접 그녀를 케어할 것이다. 다행히 앱은 잘 작동했고 친구목록에 현지의 아이디도 보였다. 노량진 쪽에 내 아이콘이 떠 있었고 유일한 앱 내 친구인 현지의 아이콘은 경상도 쪽에 떠 있었다. 처음엔 고향에 갔나 싶어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확대를 해보니 현지의 위치는 부산이 아닌 김해였다.
현지네 부모님이 김해 쪽으로 이사를 간 건가? 연락 끊고 산다고 했었는데. 다른 연고가 있나? 왜 부산이 아니고 김해지...
나는 정말이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지의 현재 위치와 창수의 SNS에 나와 있는 농장 주소를 비교해 봤다. 현지는 창수의 농장 반경 1km 내의 모텔촌에 있었다.
뒷목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짜증이 확 올라왔다. 화가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상황만으로 둘이 같이 있을 거라 단언할 수는 없다. 나는 그것보다(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지만) 현지의 아둔함에 짜증이 난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 앱은 삭제하거나 휴대폰에서 위치제공을 비활성화하면 위치확인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멍청한 년은 이런 단순한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도망 왔다는 사람이 이렇게 치밀함이 부족해서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만약 필리핀에 있는 남자친구가 이 앱을 근거로 위치를 특정해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전화와 연락을 받지 않고 숨을 거라면 앱에 있는 친구목록에서 나를 차단하는 정도의 정성은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맥이 빠진 채 고시원을 나왔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니 언제 챙겼는지도 모를 블루투스 이어폰이 있어 무작정 귀에 꽂았다. 그러나 지금 기분에 어떤 노래를 들어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무 노래도 틀지 않았다. 지금부터 뭘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아까 잠을 오래 잔 탓에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내일 장사준비를 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노량진 골목으로 취객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아스팔트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아스팔트 냄새가 음식물쓰레기 냄새와 섞여 기분 나쁘게 코를 찔러 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우선 이 냄새나는 골목을 벗어나 큰 길가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