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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 Jan 08. 2024

기억의 흔적들

연극체험교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만진다.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니 흩날리는 눈의 세상이다.

축복처럼 머리에 소복이 쌓이는 첫눈이 어느새 찰나처럼 사라지고 순간을 포착한 기쁨에 어리둥절했다. 연극수업을 시작하고 끝내면서 꿈결 같았던 시간이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꿈이 아니었음을 안다. 내 안에 남은 작은 흔적으로.


별들이 흩어진 흔적들, 어스름 남아있고 나는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언덕을 올라 아주 작은 소극장 안으로 들어간다. 으스스 몸은 떨리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두 컴컴하다. 흔적을 찾아 나선 이곳에서 가느다란 떨림으로 나는 또 하나의 흔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연극이 왜 하고 싶었을까?

한때는 나를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 무대 위의 설렘. 잘 모르겠다. 그냥 연극이 좋았다. 좋아하는 것은 다 그렇지 않은가?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꿈꾸는 소행성',  '어린 왕자' 이런 단어들에 호기심을 품고 연습실로 향했다. 2 기수 수업에 참여했다. 연극은 하고 싶은데 어색함은 어쩌나? 처음 몇 번은 그렇게 하나의 막을 찢어내는 고통을 감수하며 그곳으로 갔다. 자기 이야기로 구성되는 수업은 역시 불편했다.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보라고 하고 그때의 느낌을 말해 보라는 의도에 따라가지 않고 반항하고만 싶었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생의 주기, 나의 생각들 그것들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 수업은 내가 생각한 새로운 극의 완성이 아닌 나를 일으켜 세우는 자아의 완성을 향해가는 시간이었던 것을.


신기하게도 하나의 문장을 던져주면 강사들은 하나의 페이지를 완성해 냈다.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인생의 실타래를 술술 풀어내며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냈다. 시큰둥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져 갔다. 내 이야기로 무대를 채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지만 동료들이 있어서 즐겁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엄마 같은 분들을 모시고 어떻게 수업을 이끌어 나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부담감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연습을 거듭하면서 정말 많이 배우고 갑니다. 저희가 이것저것 가르쳐 드렸지만 실제로는 저희가 많이 배웠습니다."


이때 내 머릿속을 맴도는 하나의 문장이 있다. 너무 흔한 말, 그렇지만 그 말이 어찌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논어 술이(述而) 편에 “세 사람이 함께 가면 반드시 내 스승 삼을 만한 것이 있으니, 잘한 것은 따르고, 잘못한 것은 고쳐라(三人行必有我師,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는 글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 어떤 면이든 배울 만한 것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 마지막 연극수업발표를 마치며 선생님들의 소감은 한결같이 부담감으로 시작했다가 감동으로 끝났다고 했다. 나는 한사코 엄마뻘은 아니라고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들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 말들이 이해가 됐다.

함께한 동료의 자녀는 벌써 결혼을 해서 서른이 넘었고, 나도 큰 아이는 대학생이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딸과 아들 같은 사람들에게 배우고 익히며 함께 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젊은이들의 열심을 보며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 모습만으로도 기특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청춘이었다.


꿈과 삶이 어우러진 예술의 무대, 일상에서 벗어나 서 보는 무대,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일상. 남겨진 흔적들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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