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그것도 아주 이른 꼭두새벽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렸다.이윽고 고속도로를 비치는 가로등 불빛이 새벽빛에 희미해지고 우리는 바람 가득한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 정문을 통과하는계단이 있고 부석사 옆길로 된 산길이 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오르막으로 된 산길을 오른다.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은 한참 이어졌는데 바람을 안으며 오르는 길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하산할 때 안양루와 범종루를 통과하는 계단을 내려오면서 가파른 산길만큼이나깊고급한계단의 높이를 체험했다. 그토록 가파른 산 중턱에 절이 있다니 놀라웠다.
아무튼 지간에 고개를 올려봐야만 닿을 수 있는 무량수전에 도착한 우리들은 말로만 듣던 부석이 있는 곳으로 곧장 도달했다. 의상대사를 사모하여 그를 지켜주기 위해 선묘 낭자가 변신했다는 거대한 부석을 보면서아침 신선한 바람이 전해주는 천삼백 년 전 선묘 낭자의 숨결을 들이쉬었다. 부석 앞에서 옹기종기 사진을 찍고 부석에 밀려 지나쳤던 무량수전을 보았다.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머릿속에 맴돌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라는 말을 떠올렸다.고도의 세월을 지켜낸 인고의 기둥을 보고 있자니 같은 자리에 늘 같은 나무로 서있는 숲의 여느 나무와 다르지 않은 생명력을 느꼈다.
배흘림기둥에 서서 앞마당 쪽을 내다보면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이 있고 그 아래에 안양루가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멀리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이 펼쳐져있다. 가파른 산에 지어진 절이라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이는 전경은 마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었다.
아침은 흘러가고 바람은 여전히 부석사를 휘감아 지나가고 잠시 시간을 지체하니 한기가 온몸에 스며서
우리는 서둘러 내려가야만 했다.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 올려보았다. 초봄의 회색빛 산기슭에 고즈넉하게 앉아있는 국보들을 차갑지만 부드러운 바람들이 끌어안고 있었다.
백 년, 오백 년, 천년.. 바람이 그들을 지켜주었으리라. 끊임없이 산을 어루만져주고 휘감아 돌아가는 그 바람들은 격정에 휘감긴 역사를 지켜주었으리라.
우리네 삶을 지켜주었으리라.
청송 주왕산 주산지
그곳에도 바람이 몹시 불었다.
청송 깊은 곳으로 들어와 송소고택에 잘 곳을 마련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산책을 즐기려던 우리들은주산지로 향하는 길목의 바람에 또 한 번 흔들렸다. 군데군데 자리한 고드름 폭포와 폭포를 따라 올라간 주상절리의 절벽들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주산지로 향하는 길에 서있는 겨울 끝자락의 나무들은 바람에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겨우내 맨 몸뚱이로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흔들렸을 나무들...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맨 꼭대기에 물감을 묻힌다면 휘몰아치는 가지로 하늘을 도화지 삼아 이리저리 훌륭한 그림이 나올 법도 한데.. 휘휘 바람소리인지 나뭇가지 서걱거리는 소리인지 내 머리칼을 뒤집으며 귀에 부닥치는 바람소리, 나무소리...
내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내 귀로 바람소리, 나무소리를 듣고 있는데 어디 저 한 곳의 나뭇가지가 유심히 눈에 띈다. 겨우내 산바람을 맞으며 흔들거렸을 겨울나무 가지 얇은 곁가지가 점점이 씨눈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고개를 이리도 돌리고 저리도 돌려봤다. 웅웅 거리는 바람은 휘몰아치는데, 가지가 흔들려 이리저리 빗자루처럼 쓰러져가는데, 나뭇가지 가느다란 가지마다 점점 씨눈이 뿌려져 있는 게 아닌가..
바람은 단지 바람이 아니다. 봄눈 씨앗을 심어주는숨결이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이미 바람은 나무에 봄을 심어주고 있었다.
바람 속에 몸을 흔들던 나무들을 지나 한참을 걷다 보니 주왕산의 산세에 둘러싸인호수와 고목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산지는 조선 숙종과 경종 재위 시 땅을 파고 둑을 쌓아 만든 인공 저수지로 오랜 세월 농민들의 터전이 되어왔다. 주산지의 물안개와 수백 년의 고목들이 최근 한 영화에 배경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끊임없이 휘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사진 몇 장을 찍고 역시나 그 바람을 품고 내려왔다.
주산지에 물 파도를 일으키던 주왕산의 바람은 물과 나무와 산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계절을 불러오고 생명을 불러온다. 바람은 바람이 아니었다.
천년의 절을 지켜주었던 부석사의 바람...
수백 년의 고목을 키워주었던 주왕산의 바람...
그 바람은 지금 여기에도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키워주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 3월의 어느 날 겨울과 봄 사이의 바람을 맞으며 여행을 다녀온 기록을 찾아 여기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