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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학거사 May 16. 2024

자기의 덫, 민낯

[현실 타파_12]

세상을 살아가며 각자의 사고방식은 문제해결, 의사결정, 학습, 창의성 발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라도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 다양한 관점을 탐구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들은 우리가 문제를 만들었을 때와 동일한 수준의 사고방식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라고 하므로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전혀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 표현해 보아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로저 마틴은 수십 년간의 경험과 그에 따른 심오한 고찰 끝에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며, “기존 모델을 열심히만 적용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으로 세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생각의 방식(a new way to think)”을 필요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일상에서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이루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사고방식(New Lines of Thinking)을 위한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가 필요함을 인식하여야함에는 고정되거나 한쪽으로 치우침을 미연에 배제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능적인 메타포 시대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콧노래를 불러도 시원치 않으나, 쉰내 나는 케케한 “쉰념”으로 결함이 있는 방식을 주구줄창 지속적으로 적용하면서 그 비효율에 대한 많은 경험으로 조정과 변경을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화 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며, 단지 제대로 이행이 안 된다는 것을 재확인할 뿐일 것입니다. 큰 문제없고 단지 쉬우므로 기존의 방식으로 가려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귀찮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 습성으로 늘 하던 방식대로 그냥 하게 되면 상당부분 효율성이 떨어지고 현실적인 부분과 상황적인 부분에서 보편적인 큰 사고의 틀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적용이 제대로 되지 못하므로 자기의 덫에 걸리기 십상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함정에서 자기 의는 인간의 지혜로 다다를 수 있는 최선 및 최고의 방책으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Ɵ의 계명에 있고, 인간 본성과 양심에서 자연법에 따라 당연히 추구해야 될 덕목에 속하기에 인간이라면 의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한 바이나, 스스로 죄인임을 망각한 채 의롭다함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의 의를 추구함이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으므로 Ɵ앞에 자비와 긍휼을 구하지 않고, 의로움을 획득하여 설수 있다는 사고이므로 Ɵ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덫을 스스로 치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접근을 필요로 하는데, 먼저 자신의 측면과 두 번째는 신앙을 이루는 교회적 측면에서의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로 해보입니다. 자신의 측면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운다는 것은 회개를 통한 죄의 용서를 거부하는 꼴이므로 성경 말씀의 기본적 중심축인 원죄를 깨닫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소치로 볼 수 있고, 그로인해 자비를 구하기는커녕 Ɵ의 의이신 그리스도도 사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자신의 할 바의 역할과 자세를 다하며.. 축복과 은혜를 갈망하여야 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오히려 축복일 수 있고, 고난이 유익이라 하심에도 그에 따르는 고난과 연단, 훈련은 제겨 버리려 합니다. 교회적 측면으로 바라보면, 형식적이며 행사적 접근으로 뽕을 빼버림보다는 Ɵ 사역의 타입라인에 적절한 방식의 접근을 이루어야함에도 스스로들의 입장을 굳혀가는 모습에 변화를 지녀야한다 해보지만, 그 또한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앎에 있어 Ɵ께서 하실 것이라 봅니다. 예배의 절차/순서/방식/교제 보다는 각 영혼들의 심령의 변화를 이루어 주님 오심을 맞이해야하는 입장에서 그에 대한 입장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자기합리화에 의함에 있어 스스로들은 옳으며 절대 틀리거나 잘못됨은 별로 없을 것이라 함은 당연할 것이나, 그 잘못 없다함에 문제가 발생되면 다른 곳으로 책임을 전가하고.. 그에 대한 개선의 노력보다는 스스로의 이러서 저래서라는 입장을 내세우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셔서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구석에 있으면서도 동조되어 우리가 옳다함에 마취되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이 정도는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하므로 용량 초과로 쇼크사를 일으킬 정도가 됨에도 전혀 인지 못하게 되는 그것이 자기 덫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합리화에 급급하게 되어 양심적 옳은 소리와 정보는 곳곳을 짓눌러 틀어 막아버려 조용해짐으로 불협화음과 갈등은 흔적 없이 사라짐으로 자신의 것이 맞고 옳다는 착각으로 무서운 덫을 스스로들이 쳐 놓고 있음조차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먼저 주님께 혼날 각오를 하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라는 답을 얻고자 하여.. 지금 그대로가 아닌, 원하심을 향하여 새로운 판을 마련하고자함은 율법과 복음을 가로막는 남용적 위험을 줄이고, 복음을 이용하여 방종적으로 자신들에게 사기침과 종교적 공로와 보상, 인정에서 벗어나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성장 운동”의 신학적 이슈에서 교회 자체에 대한 연구와 강조는 우수하지만, “Ɵ의 나라”에 대한 언급과 연구가 별로 없음은 개혁주의 선교와 교회성장 신학 교재 첫 장에 기술된 내용으로 Ɵ의 나라에 있어 교회는 종의 위치에서 그 건설에 우선순위를 두는 의욕적이면서도 겸허한 교회 성장관을 마련하여야 한다고 제시합니다. 더불어 교회 성장은 “수적인 성장(Numberical Growth)”에 치중한 나머지 신앙의 성숙성 등 “질적인 성장”에 대하여는 무관심함에 “양적이며 수적인 성장”에 맹렬한 공격을 받아 마땅하며, 수적인 성장의 기만성에 유의하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신학자 로버트 허드너트는 그의 저술“교회 성장이 문제가 아니다”에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교회 성장이 문제가 아니며,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성이 문제”라 하였고, 도날드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 운동은 교회 성장에 대한 기본적 입장만을 신학적으로 정리해 놓고 나머지 신학 사상은 각 교파의 신학자들에게 완성하도록 부탁한다고 하였다.”라고 일갈하며 재미있는 착상이며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촌철살인 해버립니다. 이는 교회의 수적인 성장을 극대화하고 복음의 사회정의적 구현을 극소화하려는 장치라는 비난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위 논제에 대한 결론으로 제시된 부분을 살펴보면, “한국적 교회 성장신학의 수립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필요성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이 신학을 수립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우리에게 또 주시지 않겠는가?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은 교리 논쟁에 몰입한 나머지 개신교적 학문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였고, 지금도 교리 논쟁과 신앙 고백적 문제에 치중하는 인상을 준다함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Ɵ의의 은혜의 주권에 의하여 살고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축복의 신학, 번영의 신학은 성경적 신앙을 해치는 위험부담을 내포하므로 위험한 자기 덫을 깊게 놓지 말고, 교회성 회복으로 역사상 교회가 가장 교회다웠던, 신약적 교회상을 회복해.. 사랑의 역사와 극적인 성령의 역사들이 살아 숨 쉬는 교회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Ɵ을 믿는다는 것은 신나는 일로 삶이 변해가고 진정한 기쁨을 알아가는 놀라운 감동을 주는 교회로 변화되어 믿지 않는 자들조차도 Ɵ에 대한 오해로 선뜻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함을 걷어버리고, 교회 다니면서 성경공부나 설교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수동적인 신앙생활을 넘어서는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강력한 성력의 역사를 제대로 경험해보는 교회가 되었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고 성취되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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