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신앙인들은 교회는 다니지만, θ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배에는 참가하지만 삶은 이전과 다르지 않고, 기도는 하지만 인생의 방향은 여전히 자기 뜻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것이 실제 선택과 태도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모습이 반복되다 보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앙은 마음에 위로만 주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신앙이란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θ께서 한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은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함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바꾸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θ은 때로 사람을 부드럽게 달래는 분이 아니라, 인생을 뒤흔드시는 분으로 찾아오십니다. 평온해 보이던 일상이 깨지고, 갑작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고, 예상하지 못한 고난과 문제 앞에 서게 될 때, 사람은 그제야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는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붙들고 살아왔는지를 비로소 돌아보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각성의 시작입니다. 영적 각성은 감동적인 은혜 체험 이전에, 인생의 불편함으로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고, 이전보다 생각이 많아지고, 괜히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더 이상 예전처럼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흔들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신앙이 깨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θ은 이 시점에서 사람을 단번에 바꾸지 않으십니다. 대신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 “지금 네 기준은 무엇이냐”, “너는 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하느냐”. 이런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반복되기 시작할 때, 사람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게 됩니다. 이전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무의미해지고, 대충 넘기던 삶의 태도가 불편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내 방식으로는 안 되는구나.” 이 고백이 바로 회심으로 가는 문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회심은 교회를 처음 나오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진짜 회심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회심은 종교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결정권자가 나 자신이었다면, 이제부터는 θ이 인생의 주인이 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생각 하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돈, 사람, 성공, 인정, 안정이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θ과 말씀과 진리가 기준이 됩니다. 회심이 없는 신앙은 겉모양만 기독교인일 뿐,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자신이 신입니다. 그러나 θ은 결단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결심해도 쉽게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θ은 우리를 겉사람만 바꾸지 않으시고, 속사람을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중생은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격이 좋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이전에는 말씀이 지루했고 기도가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달라집니다.
세상 일에는 점점 공허함을 느끼고, θ에 대한 생각은 깊어집니다. 죄에 대해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지 않게 되고, 양심이 민감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노력의 결과라기보다, θ의 생명이 사람 안에 들어와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중생은 번쩍하는 체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주 서서히 일어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변화의 방향입니다. 이전보다 θ을 더 의식하게 되었는가, 이전보다 말씀 앞에서 겸손해졌는가, 이전보다 죄가 불편해졌는가, 이전보다 기도가 자연스러워졌는가, 이것이 판단 기준입니다. 신앙이 깊어졌다는 것은 교회 일을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니라, θ 앞에서 숨길 것이 줄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θ은 사람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바로 성화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성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심 이후 몇 주 안에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 기대하지만, θ은 사람을 급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성화는 급작스러운 변화보다, 평생에 걸친 다듬어짐입니다. 말버릇, 성격, 사고방식, 인간관계, 돈에 대한 태도, 욕망, 상처, 열등감, 교만까지… θ은 삶의 영역 하나하나에 개입하시면서 사람을 빚어 가십니다. 성화의 가장 큰 특징은 불편함입니다. θ이 손대시기 시작하면 편안함이 줄어듭니다. 이전에는 괜찮던 태도가 찔리기 시작하고, 했던 말과 행동이 돌아와 마음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정죄가 아니라 치료 과정입니다. θ은 벌 주기 위해 아프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고쳐 주기 위해 아픔을 허락하십니다.
진짜 위험한 상태는 죄를 지어도 아무 느낌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때는 이미 영혼이 마비된 상태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흐르는 한 가지 개념이 바로 θ의 섭리입니다. 섭리란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들 속에도 θ의 손길이 숨어 있다는 뜻입니다. 실패, 관계의 단절, 질병, 좌절,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들… 이 모든 것이 θ의 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θ은 그것들을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을 통해 사람을 다듬고, 방향을 틀고, 마음을 낮추시며, θ께 돌아오게 만드십니다. 섭리는 θ이 조용히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뜻이 이루어질 때만 θ을 느끼지만, θ은 뜻이 무너질 때도 일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의 계획이 무너질 때, θ의 계획은 또렷해집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여기 오지 못했을 것이다.” 영적 각성, 소명, 회심, 중생, 성화는 따로 떨어진 단계가 아닙니다. 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θ은 사람을 깨우시고, 부르시고, 돌이키게 하시며, 새롭게 하시고, 끝내 빚으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있습니다. θ과 함께 사는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엉성한 신앙은 θ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은 신앙입니다. 예배는 있지만 동행은 없고, 말은 있지만 순종은 없고, 기도는 있지만 방향은 내 뜻입니다. θ께서 인생을 흔드시는 이유는 이 엉성함을 끝내기 위함입니다. 대충 믿고, 적당히 살고, 필요할 때만 찾는 믿음을 무너뜨리시고, 전부를 맡기는 믿음으로 이끄시기 위함입니다. θ은 완벽한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다만 진짜로 맡기려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넘어져도 다시 오고, 실패해도 돌아오고, 도망쳐도 결국 θ 앞에 서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θ은 지금도 조용히 사람을 부르십니다. 인생을 흔들어 부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네가 주인 되지 말고, 내가 주인 되도록 자리를 내어 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