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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라는 허울과 신앙이라는 이름

by 잡학거사

제가 1년 째 월 20시간 이상을 봉사하는 지역의 주민자치센터라는 공간은 언제나 조용하며, 드라마처럼 격렬한 갈등이 일어나는 곳도 아니고, 누군가 크게 고성을 지르는 자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공간에는 오히려 더 위험한 일이 일어난다.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이다. 봉사라는 이름 아래, 공동체라는 말 아래, 누군가는 편안히 자기 일을 하고 간다. 도장은 찍히고 출석은 인정되지만,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주민을 위해 모였다는 자리는 점점 공적인 논의의 공간이 아니라 각자의 사적인 공간으로 바뀌어 간다. 회의 시간에 전화를 받고,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메시지를 처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풍경이 된다.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마음속으로 알고 있다. 이 자리는 더 이상 봉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상한 일은, 이런 상황이 반복될수록 아무도 크게 불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을 행동이, 어느 순간 관행처럼 굳어진다. "원래 이런 곳이야", "다들 바쁜데 뭐", "나라고 별수 있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너짐에 순응하는 언어에 불과하다. 봉사는 공동체를 살리는 일인데, 그 봉사가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편의를 보장하는 수단이 되어버릴 때, 그 공동체는 이미 안에서부터 금 가 있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말한다. 규정을 만들자고. 처벌 기준을 세우자고. 봉사가 형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관리 시스템을 강화하자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다. 왜? 규정이 필요해졌는가 하는 질문이다. 규정은 선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규정은 양심이 무너진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등장한다. 원래 봉사는 누가 보지 않아도 정직해야 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감시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절제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는 "보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된다"는 분위기가 된다. 그때부터 공동체는 도덕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감시로 유지될 뿐이다. 한 사람이 규칙을 어기는 것은 작은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함께 눈을 감는 순간, 그것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집단의 붕괴가 된다. 어느 순간 진짜 봉사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되고, 편하게 이용하는 사람이 당연한 사람이 된다. 양심적인 사람은 손해 보는 존재가 되고, 방종한 사람은 요령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공동체는 오래갈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게 신뢰가 무너지고, 결국 공동체 전체가 냉소의 공간으로 변해 간다. 봉사의 본질이 사라진 자리에는 관계도 남아 있을 수 없다. 이쯤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이것은 진정 자치센터 이야기만일까?. 우리 사회의 한 단면에 불과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모습이 교회 안에도, 신앙생활 안에도 똑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풍경은 너무도 익숙하다.


예배 자리는 채워져 있으나 마음은 비어 있는 경우, 봉사의 자리는 지켜지지만 헌신은 없는 경우, 말은 신앙인데 삶은 세상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경우.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변화된 사람은 많지 않다. 신앙은 있지만, 경외는 없고, 종교는 있지만, 하나님은 없는 듯한 모습들... 예배는 의무처럼 드려지고, 봉사는 스펙처럼 여겨지며, 직분은 권력처럼 인식된다. 어느 순간 신앙은 삶을 뒤흔드는 힘이 아니라, 삶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된다. 힘들면 기도하지만, 자신을 내려놓지는 않는다. θ께 맡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놓지 않는다. 회개를 말하지만 변화는 없다. 은혜를 이야기하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신앙은 위로가 되었지만, 경고는 되지 못한다. 용서는 배웠지만, 자기부인은 배우지 못했다. 예수께서 가장 강하게 꾸짖으신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는 흠이 없었고, 규정도 잘 지켰고, 종교적 언어에도 능숙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θ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기 의를 섬기고 있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말이 신앙의 증거처럼 여겨지고, 봉사의 시간과 직분의 크기가 믿음의 깊이를 대신한다. 그러나 θ은 숫자를 묻지 않으신다. 출석 횟수를 세지 않으신다.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보다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신다. 얼마나 했는가보다 어떻게 했는지를 보신다.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고수하는 신앙은 θ 앞에서 아무 힘이 없다. θ은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많이 한 사람보다 진실한 사람을 인정하신다. 크게 봉사한 사람보다 정직하게 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신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보다, 드러나지 않는 태도를 보신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어떻게 사는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교회 안에서의 봉사도, 주민자치센터에서의 봉사도 본질은 하나다. 모두 "맡김"이라는 이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로부터, 그리고 θ으로부터 무언의 신뢰를 위임받은 자리다. 그 자리는 내가 편해지라고 주어진 자리가 아니라, 남을 살리라고 주어진 자리다. 나를 드러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나를 낮추기 위한 공간이다.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그러나 θ 앞에서는 어떤 가면도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는 이유로, 봉사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직분이 있다는 이유로 θ 앞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θ은 종교를 보시지 않는다. 사람을 보신다. 역할을 보시지 않는다. 마음을 보신다. 봉사에서 무너진 양심은 공동체를 망가뜨린다. 신앙에서 무너진 진실은 영혼을 망가뜨린다. 둘 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조용히 썩어간다.


그리고 그 썩음이 일정 지점을 넘어서면, 갑자기 무너진다. 사람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러나 사실 그 무너짐은 오랫동안 준비되어 온 결과일 뿐이다. 진짜 봉사는 시간을 내는 일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일이다. 진짜 신앙은 교회를 오가는 일이 아니다. θ 앞에 서는 일이다. 진짜 믿음은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선택으로 드러난다. 편해지는 쪽이 아니라, 불편해지는 쪽을 선택하는 것. 유리한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을 선택하는 것. 아무도 보지 않아도 정직한 것. 알아주지 않아도 책임지는 것.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진실을 붙드는 것. 신앙은 위로만 주지 않는다. 신앙은 경고한다. 회개를 요구한다. 방향을 틀게 한다. 삶을 흔든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통해 사람을 새롭게 한다. 봉사에서든 신앙에서든, 결국 남는 질문은 하나다. “나는 지금 θ 앞에 바로 서 있는 사람인가?” 이 질문 앞에 서본 적 없는 신앙은, 언제든지 형식이 된다. 이 질문을 묻고 사는 사람만이, 진짜 신앙 곁에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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