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삶이 바뀌지 않는 믿음은, 사실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습관일 가능성이 크다. 입술은 θ을 고백하지만, 선택은 언제나 자기 편인 상태. 예배는 드리지만 삶은 그대로이고, 신앙의 언어는 늘어가는데 성품은 바뀌지 않는 상태. 이것이 바로 "믿으면서 안 바뀌는 신앙"의 실상이다. 신앙은 위로는 되지만 경고는 되지 않고, 은혜는 말하지만 책망은 피하며, 인내는 요구받지만 변화는 거부당하는 구조 속에 머무르는 삶. 이 상태에서 사람은 쉽게 안심한다. 교회에 다니고 있으므로, 성경을 알고 있으므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므로 괜찮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정말 θ을 믿고 있는지, 아니면 "믿는다는 말"을 믿고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런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에 대한 용서"가 과도하게 쉽다는 점이다. 타인의 부족함에는 기준을 세우지만, 자신의 부족함에는 무한한 관용을 베푼다. 다른 사람에게는 신앙의 잣대를 들이대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늘 평범하고 정상이라는 면죄부를 준다. 그래서 변화되지 않은 삶이 오래 지속되어도 스스로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편해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여긴다. 누군가 자신의 신앙과 삶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면, 그는 충고를 들은 것이 아니라 공격을 받았다고 느낀다. 회개하라는 말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간섭으로 받아들여지고, 바뀌어야 한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비난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사람은 신앙 안에서조차 변화를 불편해하는 상태가 된다.
이 상태의 중심에는 "자아"가 있다. θ은 입으로는 주님이지만, 실제 삶의 주인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다. 기도조차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처럼 사용되고, 말씀마저도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재료로 사용된다. θ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θ을 자기 계획 안에 끌어들이려 하는 신앙. 이때 신앙은 순종이 아니라 협상이 되고, 믿음은 헌신이 아니라 거래가 된다. θ을 믿는 것이 아니라, θ을 통해 자신을 지키는 삶이 된다. 이러한 신앙은 언제나 "균형감 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중심적인 상태다. “나는 극단적이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는 "나는 변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때가 많다. “적당히 믿자”는 말은 “이 이상은 내 삶에 침범하지 말라”는 방어선이 된다. θ은 위로와 보호는 제공해야 하지만, 방향을 바꾸는 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간섭하지 않으시는 θ, 요구하지 않는 θ, 부담 주지 않는 θ만을 원한다. 그래서 신앙은 점점 편해지지만, 사람은 점점 강퍅해진다. 믿음이 자라면 겸손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말이 세지고 판단이 앞서고 자기 확신만 커진다면, 그것은 성숙이 아니라 위험 신호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이웃을 향한 태도는 날카로워지고, 자신을 향한 기준은 느슨해진다면, 그것은 신뢰가 아니라 자기합리화다. 기도는 늘어나지만 사랑은 줄어들고, 봉사는 늘어나지만 인내는 사라진다면, 그 신앙은 이미 어딘가에서 방향을 잃은 것이다. θ을 가까이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점점 멀어져 간다면, 그 신앙은 위로는 줄지 몰라도 생명을 주지는 않는다. 믿으면서도 바뀌지 않는 사람은 흔히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그 은혜는 자신을 낮추는 은혜가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은혜로 사용된다. 회개의 은혜가 아니라 면죄부의 은혜, 돌이킴의 은혜가 아니라 합리화의 은혜,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은혜가 아니라 지금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은혜만을 붙든다. 은혜의 본질은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인데, 신앙이 은혜라는 이름으로 아무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 은혜는 성경의 은혜가 아니다. 이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점은,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고, 말씀을 알고, 기도도 한다. 사람들 눈에는 모범 신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 있다. θ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결정권은 결코 맡기지 않고, 순종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안전지대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믿음의 껍데기일 뿐이다.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라, 잘 관리된 종교 생활이다. 참 믿음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자신이 싫어지고, 자신의 한계가 보이고, 변하지 않는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을 지나가게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런 불편함도 없는 신앙은 오히려 위험하다. 신앙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주인 자리에서 내려놓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신앙은 원래 사람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러나 자기중심적 신앙은 무너짐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θ과 함께 변화의 길로 들어서기보다, θ을 옆에 세워두고 자기 길을 간다. θ은 조력자가 되고, 주인은 여전히 자신이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신앙은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굳어진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딱딱해진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θ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만 크게 들린다. 믿으면서도 바뀌지 않는 상태는 결국 θ보다 자기 편의가 우선인 삶이다. 진리는 알되 따르지 않고, 말씀은 읽되 살지 않으며, 신앙은 고백하되 순종하지 않는 상태. 이것이 자아의지가 주인이 된 신앙이며, 방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종교 생활이다.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묶인 가장 답답한 상태다. θ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기 안에 갇힌다. 신앙이 삶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관성이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다고 해서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두려운 것은, 전진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다. 진짜 믿음은 안전한 지대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그 지대 밖으로 이끈다. 내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하고, 내가 고집하던 생각들을 흔들고, 나 자신을 다시 보게 한다. 믿음은 말이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어느 쪽으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삶의 방향. 지금 내 삶은 θ 쪽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묻게 한다. 이 질문 앞에 서 보지 않는 신앙은 언제든지 종교로 남을 수 있다. 자아의지가 주인이 된 신앙은 결국 조용히 사람을 굳게 만든다. 그리고 굳어진 신앙은 어느 순간 θ 앞에 서는 법을 잊어버린다. 예배는 자리 채우기가 되고, 기도는 습관이 되며, 신앙은 명분만 남는다. 그러나 θ은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신다. “너는 나를 믿고 있느냐, 아니면 네가 만들어 놓은 θ을 믿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 서는 순간, 비로소 믿음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