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모두는 은혜를 원하며, 용서받고 싶어 하고, 위로받고 싶어 하며, 정죄받지 않고 싶어 한다. 그것은 신앙인의 자연스러운 갈망이나 문제는, 은혜가 삶을 바꾸는 능력이 아니라 삶을 덮어주는 천처럼 사용될 때 생겨난다. 은혜는 원래 죄를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직면하게 만드는 빛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를, 자신이 변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처럼 사용한다. “우리는 다 연약하다”는 말이 회개의 고백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문장이 되고, “은혜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 전환이 아니라 면피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너진 부분을 θ의 은혜로 덮어 놓고, 그 아래에서 여전히 같은 삶을 반복한다. 은혜는 본래 사람을 안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뒤흔든다. θ 앞에서 자신의 민낯을 보게 만들고, 더 이상 자신을 합리화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다.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이 편해지기 이전에 마음이 찔린다. 그런데 거짓 은혜는 찔림이 아니라 안도만 준다. “괜찮아, 다 용서돼”라는 말만 남고, “돌이켜라”라는 음성은 사라진다. 그래서 신앙은 위로만 있고 긴장은 없으며, 사랑은 말하지만 두려움은 없는 상태가 된다. θ은 따뜻한 분으로만 남고, 거룩하신 분은 사라진다. 용서는 강조되지만 회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책임은 십자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시작되었다. 십자가는 죄의 무게를 없애준 것이 아니라, 죄를 더 이상 가볍게 여길 수 없게 하는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가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면허증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다. 은혜는 “괜찮다”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라”는 θ의 음성이다. 그러나 은혜가 방패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상처와 습관, 성품의 어둠까지도 은혜로 감싼다.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자연스러움"이 되고, 반복되는 죄가 "인간적 한계"로 불리며, 회피는 "지혜"로, 침묵은 "겸손"으로 포장된다. 그 결과, 사람은 스스로를 점점 더 보호하는 신앙인으로 변해간다. 기도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되고, 말씀은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는 재료가 된다. 은혜는 θ을 향한 책임감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연민만 키운다. 그래서 신앙은 점점 부드러워지지만, 인격은 단단해지지 않는다.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고, 상처에 대해서만 예민해진다. θ께는 무감해지고, 자신에게만 섬세해진다. 이런 신앙은 결국 삶에 열매를 맺지 못한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투는 여전히 거칠고, 성품은 쉽게 무너지며, 관계는 반복해서 깨진다. 그러나 그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기보다는 늘 환경과 타인과 상황에서 찾는다. 자신의 불순종은 "어쩔 수 없음"이 되고, 타인의 실수는 "용납 불가"가 된다. 자신에게는 은혜가 넘치고, 남에게는 기준이 엄격해지는 모습. 이것은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이 더 교묘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은혜는 사람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을 더 무겁게 한다. 왜냐하면 은혜는 값없이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대가는 십자가에서 이미 치러졌다. 그래서 참된 은혜는 항상 감사와 경외를 함께 낳는다.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죄를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삶을 가볍게 살 수 없다. 그러나 은혜를 듣기만 하고 만나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이론처럼 다룬다. 진짜 은혜는 사람을 부드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강하게 만든다.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게 하고, 실패했을 때 다시 시작하게 한다.
그러나 방종의 은혜는 다시 시작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굳이 시작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용서받았는데, 무엇을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은혜가 시작이 아니라 종착지가 될 때, 신앙은 정체된다. θ은 은혜를 빌미로 죄를 품는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실패를 정죄하지 않으시지만, 실패에 안주하는 것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죄를 짓는 것은 인간의 연약함일 수 있지만, 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선택이다. 은혜는 연약함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에서 빠져 나오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은혜를 진짜로 만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삶이 그대로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편안한 은혜만을 원한다. 자신의 일상을 흔들지 않는 θ,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는 말씀, 양심을 건드리지 않는 설교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변화는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익숙한 자신을 떠나는 것은 두렵고, 새로운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낯설다. 그래서 사람은 은혜를 말하면서도, 변화의 문 앞에서는 멈춘다. 회개의 문은 닫고, 위로의 창만 연다. 그러나 은혜는 결국 문을 두드린다.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고, 침묵 속에서도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어디 서 있느냐.” 이 질문은 사람을 편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살게 한다. 정직하게 만들고, 무너뜨리지만 다시 세운다. 신앙은 이 질문을 피해 갈 수 있을 때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 앞에 설 수 있을 때 살아난다. 은혜는 무책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을 가능하게 한다. 왜냐하면 θ이 먼저 우리를 책임지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 없다. 은혜는 죄를 방치하라는 허가가 아니라, 죄와 결별하라는 초대다. 십자가는 침묵이 아니라, 결단의 자리다. 신앙이 편해질수록,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은혜가 점점 가벼운 말이 되고, 회개가 점점 등장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위험 신호다. θ께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짜 은혜는 나를 위로함과 동시에 나를 낯설게 만든다. 이전의 나로는 만족할 수 없게 한다. 은혜는 결코 사람을 자기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바뀌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뀔 수 있다는 복음이다. 그래서 은혜는 가장 따뜻한 소식이면서도, 가장 엄중한 부르심이다. 부드럽지만 가볍지 않고, 위로를 주되 현실을 직면하게 하며, 사랑을 베풀되 책임을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은혜는 마지막 이유가 아니라, 첫 출발이다.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근거가 아니라, 변화할 수 있는 힘이다. 은혜를 붙잡되, 책임도 함께 붙잡아야 한다. 은혜만 있고 순종이 없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자기위안이다. θ은 당신을 위로하시기에, 당신을 세상 속에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당신이 바뀔 것을 믿으시기 때문에, 은혜를 주신다. 은혜는 삶을 흐리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명하게 한다. 이제 어디를 가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보이게 한다.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지, 어디에서 돌아서야 하는지를 드러낸다. 그래서 은혜는 고요하면서도 불편하고, 따뜻하면서도 날카롭다. θ은 은혜로 사람을 흐리게 만들지 않으신다. 은혜로 눈을 열어주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 다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