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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보다 자기 결정, 자신을 앞세우는 삶

by 잡학거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말씀도 읽고, 기도도 하며, 교회 안에서 맡은 역할도 충실히 해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앙의 중심에는 θ이 아니라 "나"가 자리잡고 있음을 스스로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 앞에서는 기도보다 계산이 먼저 나오고, 순종보다 자기 판단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을 “내가 알아서 잘 할게요”라는 말로 정당화합니다. 이 말은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θ이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선택들였습니다. 오늘 무엇을 할지, 누구를 만날지, 어디에 시간을 쓸지, 어떻게 말할지 같은 아주 일상적인 문제들 앞에서 θ의 뜻을 묻지 않게 됩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기도를 줄이고,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정직함을 미루고, 이해가 안 간다는 이유로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낸 하루하루가 쌓이면서, 어느새 우리는 θ이 통치하시는 삶이 아니라 내가 운영하는 신앙 생활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인생의 주인은 여전히 나 자신인 상태가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θ은 내 사정을 아시잖아요.” 이 말 속에는 은근히 "그러니 이번만은 봐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숨어 있습니다. 순종보다 이해를 요구하고, 순종보다 공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θ은 단지 우리의 사정을 이해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주인이십니다. 주인의 뜻보다 내 상황이 앞설 때, 우리는 이미 질서를 바꿔 놓은 것입니다.


신앙의 언어는 그대로 두고, 실제 삶의 방향타는 내가 쥐고 있는 모순이 계속됩니다. 자기 결정을 앞세우는 삶은 결국 θ을 "조언자"로 만들고 맙니다. 어려울 때만 찾고, 필요할 때만 부르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분으로 전락시킵니다. 평소에는 내가 다스리다가, 문제가 터지면 θ을 호출하는 방식의 신앙은, 사실상 θ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위기관리용 존재로 사용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θ을 믿는 것이 아니라, θ을 활용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지속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이상한 불안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잘 믿는 것 같은데, 속에서는 점점 공허해지고, 은혜에 대한 감각은 무뎌지고, 기도는 형식이 되며, 말씀은 감동보다 부담이 됩니다. θ과 친밀해질수록 자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거워지고 답답해집니다. 이는 θ이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θ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상태가 오래되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래도 남들보다는 열심히 믿지 않나”, “적어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낫잖아”라는 비교가 자기 위안이 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른 사람보다 나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θ 앞에서 어떤가의 문제입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안심이 생기지만, θ 앞에 서면 침묵밖에 남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살아온 방향이 θ이 아닌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언제나 내 뜻을 접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그 자리에는 불안도 있고, 두려움도 있으며,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 자리에서 진짜 자유가 시작됩니다.


자기 결정을 내려놓지 않는 사람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사실은 평생 자신에게 묶여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θ의 뜻에 인생을 맡기는 사람은 손해 보는 것처럼 보여도,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은 끝없이 책임을 져야 하지만, θ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짐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나를 앞세우는 삶은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듭니다.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해야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전부 떠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되고, 성공조차도 불안이 됩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θ께 삶을 맡긴 사람은 결과보다 관계에 집중합니다. 잘되든 안 되든, 흔들리기보다 붙들림 속에 사는 인생이 됩니다. 인생이 내 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가장 큰 위로가 됩니다. θ은 우리의 계획을 빼앗으려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계획보다 더 깊은 길로 이끌기 위해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θ의 뜻을 묻기보다, 이미 정해 놓은 결정을 θ께 보고하는 신앙을 삽니다. “θ, 제가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축복해 주세요.”라는 기도는 신앙처럼 들리지만, 방향을 놓고 보면 이미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서 묻는 기도는 “이 길이 맞습니까”이지, “이미 정했으니 도와주세요”가 아닙니다. 순종보다 자기 결정을 앞세우는 신앙은 결국 θ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 θ을 들고 다니는 삶으로 바뀝니다. 필요할 때 꺼내고, 원할 때 찾고, 불편해지면 다시 넣어두는 신앙. 하지만 θ은 우리가 관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맡겨야 할 분이십니다. 우리는 θ을 움직일 수 없고, θ만이 우리를 움직이십니다.


신앙의 성숙은 말씀을 많이 아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을 줄 아는 데서 옵니다. 기도를 오래 한다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내 뜻이 무너질 줄 알 때 성숙해집니다. 예배를 많이 드린다고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 후에 삶의 방향이 바뀔 때 변합니다. 내가 여전히 주인이라면, 아무리 거룩한 환경에 있어도 신앙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θ은 조용히 묻고 계십니다. “네가 결정할 것이냐, 나에게 맡길 것이냐.” 이 질문은 단지 오늘 예배를 드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누가 주도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신앙은 θ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θ께 인생의 운전대를 넘겨드렸는지로 증명됩니다. 자기 결정에 익숙한 신앙은 결국 θ을 불편하게 여기고, 순종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θ은 부담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쉼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쉼이 사라졌다면, 신앙이 아니라 주도권이 바뀌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θ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으로 살고 있다면, 그 신앙은 나를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나를 더 무겁게 만듭니다. 진짜 변화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이제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주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옮겨질 때, 신앙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순종은 감정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이 바뀌는 순간, 인생도 같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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