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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을 매우 정확하게 짚는 표현

by 잡학거사

자유의지는 θ께서 인간에게 주신 존엄한 선물입니다. 생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하며, 책임질 수 있도록 주신 능력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할지, 선을 따를지, 진리를 붙들지 선택할 수 있게 하신 θ의 배려입니다. 자유의지는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θ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증거이고, 인격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θ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회개할 수 있는 것도, 믿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이 자유의지 덕분입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나는 선택할 수 없다”, “원래 나는 이래”, “어쩔 수 없다”라는 태도는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θ이 주신 책임과 가능성을 거부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θ은 로봇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도, 믿음도, 순종도 자발적 선택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아의지입니다. 자아의지란 단순히 "나의 의지"가 아니라, θ보다 나를 우위에 두는 마음입니다. θ 뜻을 묻기보다 내 욕망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말씀에 나를 맞추기보다 말씀을 내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며, 순종보다 편의를 택하는 태도입니다. 겉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실제 삶의 주도권은 내가 쥐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아의지는 말합니다. “θ도 중요하지만, 내 생각이 더 현실적이다.” “θ 뜻도 알겠지만, 지금은 내가 선택할 때다.” “믿기는 믿지만, 이 부분만큼은 내 방식대로 하겠다.” 이 태도는 θ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θ을 주인으로 모시지도 않습니다. θ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필요할 때 찾아가는 조력자 정도로만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의탁이 아니라 관리가 되고, 관계가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자아의지가 강해질수록 θ은 점점 멀어집니다. 멀어진다기보다, 밀려납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결정은 내가 합니다. 기도는 하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 놓았습니다. 말씀을 듣지만 불편한 부분은 걸러냅니다. 그리고 그렇게 θ을 삶의 중심에서 밀어내면서도, 스스로는 여전히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가장 위험한 신앙의 형태입니다. 자유의지는 선택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나 자아의지는 선택의 주인이 θ이 아니라, 내가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자유의지는 문입니다. 어디로 들어갈지를 결정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나 자아의지는 “내가 가고 싶은 데만 가겠다”고 고집하는 태도입니다. 자유의지는 책임을 불러오지만, 자아의지는 θ께 책임을 묻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싸움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싸움이 아니라, 자아의지를 내려놓는 싸움입니다.


성숙한 신앙이란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의 기준이 바뀌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θ이 원하시는 것’으로, ‘내가 편한 길’에서 ‘θ이 기뻐하시는 길’로 방향이 이동할 때, 신앙은 비로소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비판해야 할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아의지입니다”라는 말은 결국 이런 뜻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선택할 수 있음이 아니라 θ 없이 선택하려는 마음입니다. 신앙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우리가 선택할 때가 아니라, θ을 빼고 선택할 때입니다. θ을 믿으면서도, θ 없이 인생을 운영하려는 태도가 바로 자아의지이며, 그것이 θ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때 신앙은 조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아의지는 반드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유의지는 θ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통로이지만, 자아의지는 θ을 밀어내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깨어야 할 지점은 여기입니다. “내가 선택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선택의 주인인가?” 신앙의 성숙은 선택을 안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택 앞에서 θ을 먼저 모시는 데 있습니다. 그때 자유의지는 축복이 되고, 자아의지는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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