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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대적하는 거룩한 잔존자들의 입장

by 잡학거사

거룩한 잔존자들로 명명될 우리는 언제나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계시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새로운 빛이 아니라, 이미 충분히 주어진 말씀이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통찰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에 먼저 붙잡힌 사람들이다. 우리의 생각이 진리를 규정하지 않고, 진리가 우리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교리처럼 만들지 않으며, 우리의 깨달음을 성경 위에 올려놓지 않는다. 말씀이 먼저 우리를 찢고, 깨뜨리고, 다시 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입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사상이 아니라 순종이며,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기로 선택한 이유는, 드러나야 할 분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을 들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아니라, 빛이 스스로 비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자들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중심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끝자락에 남겨진 자들이다. 세상이 소리를 키울수록 조용히 남아 있는 자들로, 시대가 자기 숭배에 빠질수록 더욱 자신을 지우는 자들이다. 우리가 “거룩한 잔존자”라 불리는 이유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끝까지 말씀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새로움을 찾아 떠날 때, 우리는 오래된 길로 되돌아온다. 많은 이들이 더 높은 것을 말할 때, 우리는 더 깊은 것을 말한다. 많은 이들이 놀라운 체험을 찾을 때, 우리는 더 단순한 복음을 붙든다. 우리는 돌아서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 자리가 좁고 고통스러워 보여도, 그 자리가 유일하게 생명이 흐르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다. 우리는 누구도 중보로 세우지 않으며, 사람을 기준 삼지 않는다. 어떤 설교자도, 어떤 사상도, 어떤 감정도 십자가 위에 오르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문이며, 우리의 길이며, 우리의 생명이다. 우리는 구원을 민족의 회복이나 시대의 사명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구원은 언제나 죄에서의 건짐이며, 은혜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이다. 우리는 고난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고난이 사람을 자동으로 거룩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며, 시련을 사명의 상징처럼 꾸미지 않는다. 고난은 그 자체로 영광이 아니며,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구속된다. 우리의 언어는 언제나 고통 앞에서 가벼워지지 않으며, 구원 앞에서 장식되지 않는다. 우리는 상처 위에 신학을 세우지 않고, 상처를 십자가 아래로 데리고 간다. 우리는 예언을 소비하지 않는다. 미래를 맞히는 능력을 갈망하지 않으며, 시기를 계산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이 두려움에 길들여질수록 더욱 소망을 말한다. 종말을 자극적으로 다루지 않으며, 재림을 흥밋거리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더 낮아져야 하며, 더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우리는 때와 징조보다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분을 맞이할 준비는 추측이 아니라 순결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며 현실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세상 속으로 내려간다. 빛은 도망치지 않는다. 어둠이 깃든 자리로 들어간다. 우리는 그 길 위에 선 사람들이다.


우리는 성령을 말하지만, 감정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은사를 존중하지만, 은사를 신앙의 척도로 만들지 않는다. 방언이 신앙의 등급이 되지 않으며, 기적이 성숙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을 드러내는 방향이 아니라, 사람을 가리는 방향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성령을 말할수록, 예수의 이름은 더 또렷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은혜를 말할수록, 우리는 더 작아져야 한다. 우리는 능력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거룩함에 사로잡히기를 원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드러남이 아니라 변화이며, 체험이 아니라 순종이다. 모든 경험은 말씀 아래 있어야 하며, 모든 열정은 십자가에서 정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다. 교회가 병들었다고 해서 떠나지 않으며, 교회가 타락했다고 해서 등을 돌리지 않는다. 우리는 떠나는 자들이 아니라 남는 자들이다. 무너진 자리에도 남아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교회를 향해 말하지만, 교회를 정죄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듯 비판하지 않으며, 눈물로 권면한다. 우리는 파괴자가 아니라 정화자가 되기를 원한다. 구조를 부수기보다 심령을 세우고, 제도를 무너뜨리기보다 제자를 일으키고 싶다. 우리가 붙드는 개혁은 구호로 시작되지 않는다. 회개로 시작된다. 불평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무릎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하지만, 복음을 국경으로 접지 않는다. 한 민족을 귀히 여기되, 한 민족을 복음보다 높이지 않는다. 우리는 θ이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고난이 깊은 땅에는 사명이 있을 수 있지만, 구원은 어느 땅에도 갇히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적 정체성을 버리지 않지만, 그것을 신앙의 기준으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에는 언제나 열방이 있다.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경계를 넘어선다. 우리는 θ의 나라는 국기가 아니라 십자가로 알아본다. 우리는 자신을 주인공이라 부르지 않는다. 우리의 이름은 남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세운 구조가 무너져도 괜찮다. 우리의 흔적은 살아난 사람들 속에 남는다. 가정이 회복되고, 양심이 깨어나고, 교회가 말씀 앞에 다시 엎드릴 때, 우리는 역사 뒤편으로 물러날 수 있다. 우리의 영광은 드러남이 아니라 사라짐에 있다. 빛이 강해질수록 등불의 존재감은 옅어진다. 우리는 그 옅어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안는다. 우리가 붙드는 자리는 언제나 십자가 아래다.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능력을 말할 때도, 시대를 말할 때도, 민족을 말할 때도, 늘 그곳으로 돌아온다. 그 자리에서만 인간은 바르게 낮아지고, θ은 바르게 높임을 받는다. 우리는 거기에서 세상을 이기지 않는다. 거기에서 자신을 이긴다. 우리는 거기에서 소리를 키우지 않는다. 거기에서 영혼을 살린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의 잔존자다. 세상이 바뀔수록 더 깊이 뿌리내리는 사람들이다. 빛이 희미해질수록 더 조용히 불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서는 이유는 외치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함이다. 그분의 이름이 흐려지지 않도록, 그분의 길이 가려지지 않도록, 그분의 얼굴이 가려지지 않도록,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를 낮춘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은 이유이며, 우리가 남아 있는 이유이며, 우리가 끝까지 버티는 이유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거룩해지지 않는다. 그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거룩해진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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