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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Feb 15. 2024

내면 작업 16


24.02.14



꿈 #1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 한 여자가 몹시 열등하게 굴었다. 나는 무척 내향적으로 대한다. 총 4명이 있었는데, 여자는 계속 재미없게 한다는 둥 말이 없다는 둥 유아적으로 굴었다. 이후 모임이 끝나고 나와 그 여자는 점점 친해진다. 여러 장면이 나왔었는데 까먹었다.


꿈 #2


뭔가 나를 도와주는 분위기였는데 다 잊어먹었다.


엄마의 꿈 #1


순천 어느 개울가다. 엄마는 다리 위에 있고, 친구들이 모여 맑은 물의 냇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 친구들이 엄마에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물고기 잡은 걸 자랑한다. 'OO야~ 언능 와! 엄청 많이 잡았어야! 장어도 잡았어!' 그래서 엄마도 '장어도 잡았어? 어머 그 귀한 걸 어떻게 잡았어' 한다. 엄마 말에 따르면 여자 친구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엄마의 꿈 #2


엄마한테 한 사람이 서류를 작성하면 엄청 좋다고 한다. 엄마는 그 말에 따라 서류를 작성하는데 꿈 속에서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고 한다.






항암 치료가 끝났다. 완치다. 이제 예후를 지켜보기로 했다.


 집에 오니 힘이 빠지고 피곤했다. 홀가분함, 이제 끝났구나 하는 긴장의 풀림. 오는 길에 엄마가 난데없이 꿈 얘기를 해서 들어보니 흥미로웠다. 역시 엄마는 무의식과 무척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융의 말마따나 '의식화'를 하지 않아도, 무의식과 친하게 잘 지내는 게 가능하다. 병원 검사를 받을 때 엄마 동생들도 왔다. 나에겐 이모들인데, 이모들이랑 엄마랑 셋이 대화를 나누는 걸 보니 재밌었다. 난 크게 의식하진 않았는데, 엄마 쪽 가족을 보면 확실히 모계라는 걸 새삼 느낀다. 엄마네 여자들은 강하다. 정신도 안정적이다. 내가 유년 때 느끼기론 유독 한 이모만 정신의 불쾌함을 풍겼는데, 아마 지금은 안정되지 않았을까 싶다.


 집에 와서 좀 쉬다가 작업을 하고, 이제 엄마와 헤어져야 하니 괜시리 엄마와 대화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슬금슬금 나의 그림자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오늘 유난히, 내가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졌구나를 느꼈다. 나는 어느새부터 나의 그림자를 '다루려고 하는' 중이었다. 퇴행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기이한 여력이 자라났다. 여기서 말하는 퇴행이란, 나에게 있어 충동적으로 보상 심리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굴러가다 보면 리비도의 퇴행적 정체가 더욱 거세진다. 근래까지만 해도 사로잡히기만 했다면, 오늘은 왠지 다뤄지는 느낌이다. 몹시 피곤하고, 아직도 내면에서 슬금슬금 '퇴행해'라고 충동이 올라오는데도 이렇게 글을 쓰는 것만 봐도 분명 다르다.


 병원 결과를 들으러 가는 오늘의 꿈에서 나는 나의 열등함이 의인화된 아니마와 관계 맺기에 성공했다. 이전 같았으면 거부감이 강해서 가치 박탈을 존나 했을 텐데. 꿈에서 나는 그런 면모에 사로잡히지 않고도 관계 맺기에 성공했다. 꿈에서 나온 그녀는 내가 정말이지 싫어하는 '감정적인 여자' 유형이었다. + 외향적인. 쉽게 말해 나의 열등함이 버무려진 인격이었는데, 성공했다. 의식에 있어서도 저녁에 다루기 시작한 나의 그림자는 꿈에서 나타난 것처럼 분명하진 않아도 뭔가 '다뤄지는' 기분이었다. 이 직감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오늘 차를 몰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감정이 들썩들썩하는 걸 느꼈다. 지금 내 감정은, 울고 싶어 한다. 건드려지는 뭔가가 있으면 바로 나올 거 같다. 그동안 솔직히 정신적으로 무리했다. 어머니의 정신 보호, 어머니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한 균형 잡기. 같이 지내는 24시간 동안 흐트러지지 않는 내 정신의 균형. 혼자 견뎌야 했을 무수한 시간이,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있다. 난 그런 시간을 견뎌내고, 감정으로 받아내는 데 분명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엄마가 완치될 때까지 내 책임을 완수할 수 있었다. 누나도 그렇고 이모들도 그렇고 엄마 주변 지인들 모두가 나에 대해 고생했다고, 이런 아들 없다고 위로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음에도, 내 감정은 이제서야 외로움을 토로한다. 나도 사실은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정말로 그렇게 느끼고 싶다. 가슴 깊은 곳에서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엄마에게서 그런 걸 느끼고 싶다.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엄마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5살 때부터 엄마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한 상처가 있다. 어릴 때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발달을 꽤나 많이 했기 때문에 거진 많은 걸 알아본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성장해도, 나의 깊은 내면 속 아이는 그때 엄마의 아들로 머물러 있다. 겉으로 아무리 성숙하게 굴어도, 난 엄마 앞에서 애새끼다. 여태까지 엄마한테 여러 노력과 표현, 교감에 기반한 관계 맺기를 시도했지만 사실 늘 외로웠다. 그래도 포기하는 게 아니라 더 정교해지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엄마가 표현을 아예 안하는 건 아니지만, 나의 감정이 열등하기 때문에 이 문제는 어쩔 수 없다. 열등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렇게 외로움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테니까.


 이게 내가 감정을 다루는 방법이기도 하다. 같이 꺼내지 못해서, 혼자 꺼낸다. 감정 관계를 맺고 싶지만, 늘 실패한다. 나의 감정이 열등하다고 말하는 건, 이런 감정으로서의 관계에 더욱 깊은 교감을 느낀다는 걸 의미한다. 이게 사로잡혀 있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보다 자유롭게 감정 교감을 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보는 엄마는 참 안정적이다. 내가 못하는 거의 모든 걸 잘 한다. 사람들에게 먼저 좋은 소식도 알릴 줄 알고, 위로받을 줄 알고, 타인의 투사에 사로잡히지 않을 줄도 안다. 그렇지만 엄마가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내가 느끼기에 몹시 서툴다. 엄마가 먼저 감정을 꺼낸 건 정말 손에 꼽는다. 내가 옆에서 진심을 꺼내도 엄마는 반응을 안 하거나 무관심하다. 그 냉담함은 상처를 주기에 누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저 멀티가 안 되는 사람일 뿐이다. 놀랍게도 그게 진실이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관심을 돌리지 못한 것뿐이다. 근데 또 관심을 돌리더라도 그렇게 표현을 잘 해주는 것도 아니긴 하다. 융이 말한 것처럼, 나의 엄마는 가슴 깊이 어마무시한 감정 동굴을 가졌을 것이다. 그 에너지를 꺼낼 도구가 없을 뿐, 감정이 없는 게 아니다. 홀로 그걸 안정적으로 가져가는 삶을 산다는 게 참 대단하기도 하다.


 여튼 모든 게 끝났다. 상투적으로 말하면 해피엔딩이다. 아빠가 살아있었더라면, 나만큼 엄마에게 해주지 못했을 거란 생각도 든다. 다른 면에선 힘이 되었을지언정, 정신 케어는 100% 존나 못했을 거 같다. 또 기성 세대답게 알게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하나씩 누적시켰겠지. 그래서 내가 책임을 다 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빠의 빈 자리를 그래도 부끄럼 없이 채웠다고 느낀다. 프로젝트로 따지면 100%에 근접한 완결이다. 무엇하나 심리의 어긋남을 만들지 않았다. 아쉬움이니, 아프고 힘든데 상처 받는 경험이니, 서운함이니, 외로움이니 그 무엇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엄마는 순간순간 그런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내 목표는 '자국'이었다. 자국이 남지 않게다. 감정은 사소한 바람 하나로도 갈대처럼 흔들린다. 다만, 그게 꺾여 떨어지면 그건 혹이 된다. 내가 옆에서 간병을 하며 치열하게 신경쓴 건 바로 그런 혹이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 이 시간을 오직 힘든 것만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항암 치료를 받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항암 환자들이 있었다. 신경질, 짜증, 투정, 명령, 보살핌 없는 대기. 병마와 싸우면서 그런 심리의 시련도 겪는 건 인간에게 너무 버겁다.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나에겐 너무 당연한 현실이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나는 이제 내 감정을 스스로 돌볼 줄 안다. 이 일기를 다 쓰면, 6개월의 항암 치료가 끝난다. 아들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다. 엄마 지인들은 나를 아들로 보고 대하지만, 나는 엄마를 아들로서 대한 적이 없었다. 동등한 개인으로, 인격으로, 정신으로 존중심을 가졌기에 내가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나는 100% 이기심이 발동 돼 간병하는 일을 내심 귀찮아 했을 것이다. 그 귀찮음이 있었다면, 아무리 통제하고 억압해도 반드시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말 한 마디가, 엄마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상처로 남았을 것이다. 내 양심은 소임을 다 했다. 큰 이모가 오늘 그러더라, 엄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란 사람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런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앞으로도 마음껏 나아갈 수 있을 테니까. 왜냐하면 엄마는 나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사를 안 한다. 뭘 하든 그대로 둔다. 엄마는 내 정신을 길거리의 돌멩이로 다룬다. 그래서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 배움을 잘 익혀서 타인에게도 돌려줘야 한다. 그래야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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