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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Mar 20. 2024

퍼포먼스와 큐레이팅

작업 노트 3


24.03.20



스케치 #2



15년도부터 '비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시작된 나의 창작 여정은 여지껏 제대로된 일지로 쓰인 적이 없었다. 중간중간 제도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쓰려고 하는지, 나라는 사람이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보여주기'를 하긴 했지만, 늘 불충분하게 느껴졌다. 가타부타, 창작에 왕도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품었던 시절도 있었고, 사실 지금도 그런 의혹은 아예 종식되지 않고 있다. 시의 경우에, 시론(시 세계)을 구축한 뒤에야 자신 만의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 사례가 있고, 그 반대도 있다.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창작자 입장에서 지지부진한 과정에 다소간 불안이 싹트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을 창작하려고 하는지 선취되어야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일단 몸으로 부딪히며 추후에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재서술이 가능한 사람이 있다. 전자는 미분적, 후자는 적분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런 정신의 성향 차이가 시대적 상황과 어떤 영향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18세기 낭만주의의 시대적 자장으로써 '예술'에 대한 입장을 잠시 생략하더라도, 한 창작자는 결국 자신이 적응하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에 따라 무엇을 창작할지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현대 시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대표적 시인 두 명을 꼽자면 김춘수와 김수영이 거론되기도 한다. 여기에 김지하나 오규원 등도 다뤄지며 각종 대학의 커리큘럼에서 한국 시를 배우려고 한다면 늘상 포함되는 시인들이 있다. 이중에서 산문을 발표함으로써 시인 개인의 일상과 정신 세계를 좀 더 관찰할 수 있게 도운 이들이 있고, 이를 토대로 김춘수는 앞서 말한 미분적 성향, 김수영은 적분적 성향의 행보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스스로 밝히는 바, 다른 선배 시인의 시를 흉내내거나 '등단'을 하고 싶지만 늘상 고배를 마셔 다소간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내비출 수밖에 없었던 김춘수의 젊은 시절이 있다. 그는 자신있게 내놓을 수 있는 '자신 만의 시론'이 구축되기 전까지 도통 무얼 써야 할지 혼란스러워 했다. 반면 김수영은 마치 처음부터 '자신 만의 시론'이 구축된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언어는 부모님에게 배운 것이라는 말은 아마 시로써 인정받고 싶은 수많은 문청들에게 넘을 수 없는 벽같은 갑갑함과 얄미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김수영의 시론은 부산 팬미팅에서 발표된, 그 유명한 침을 뱉어라로 대표되기도 한다. 하이데거를 탐독했던 김수영에게 '온몸으로 쓰기'는 곧 사람들로 하여금 '모더니스트'라 지칭되는 자신의 고유성으로 세상과 부딪히는 어떤 저항 의식을 자극하기에 적합했다. 


 아마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익숙한 정보일 수 있지만, 각 시대마다 활동하던 지식인, 예술가, 시민의 일상 등으로 말미암아 그려지는 당시의 '시대관'이 있다. 예를 들어 1965년에 발간된 [흑인고수 루이의 북]의 범대순 시인은 시 '불도쟈'를 중심으로 당대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 풍토와는 결이 다른 행보로 나타났다. 그는 기계 문명에 대해 친화적인 시선을 갖고, 또 시론으로 발표하며 일종의 정당화를 꾀했지만 문단에서는 '다른 의견'으로 다뤄질 뿐 그다지 유효한 영향을 끼치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범대순 시인 본인도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시론'이 달라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기계 시'라는 시론을 적극 발표하며 당대의 사람들 인식에 있어 '기계 문명'을 편협하게 다루는 걸 보다 완화하고자 여러 노력을 했다. 


기계는 인간의 창조이고, 선용이건 악용이건 간에 그것을 창조한 인간의 자유에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계를 익히며 생활한다는 것은 인간 상호간의 이웃을 익히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기계의 가치론이라 생각된다. 이와같이 기계에 대한 관념의 성장변천에 따라 시는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가. P. 56

… 시에 접하면서 저항을 느끼거나 혐오감을 갖는 사람은 일단 어떤 모진 병에 걸려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들은 현대를 너무 절대시하고 있다. 현대의 불연속적 상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가 관념적인 결함이 있고 따라서 자극과 변화에 버릇들어 온 우리들의 감각을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감각은 너무 가까이서 너무 쉽게 끝을 보려고 하는 흠이 있고 이 흠은 크게 볼 때 정상이 아님을 우리들은 깨달아야 한다… 이 시대가 어떤 시를 요구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가 이 시대를 이끌어나가야 하는가 하는 점을 암시하고자 했었던 것이다. P. 112-113

- 백지와 기계의 시학, 범대순, 사사연, 1987


 21세기 대도시에서 사는 30대의 눈으로 보기에 범대순 시인은 1987년에 할 수 있는 노력을 충분히 했다고 보인다. 전쟁이 끝나고 대도시화, 산업 혁명을 재빠르게 거치던 한국-서울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기계 문명'이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현재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처음 발전기를 들여와 가로등을 밝혔을 때 일반 백성의 반응은 무척 순진하면서도, 그래서 끔찍한 일도 더러 겪었다. 멋모르고 손을 대 고압 전류에 감전이 되어 새까맣게 타들어가 불구가 된 사례라던가, (물론 '성찰성'이니 '신체에 대한 개인성' 따위의 개념이 자리잡은 사회가 아니었기에 당사자의 고백은 무척이나 '생물'스럽다), 기존의 현실에 난데없이 '다른 현실'이 삽입되어 구경거리가 된 기록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한 사회에 어떤 변혁이 적용되고, 또 생활에 참여될 때 벌어지는 인간의 감수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유추케 한다. 범대순 시인은 선진 문물의 혜택을 받아 미국의 여러 텍스트를 접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도 '기계 문명에 대한 시적 관점'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나, 세계 어딘가에서는 도착해 있는 '시선'이 낯설고 새롭게 여겨지는 건 가로등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여기에는 무엇이 좋은 시인가, 새로운 시인가, 나아가서 독창적인 '창작'인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핵심이 있다. 사람들에게 자주 간과되는 것 중 하나는 새로움이 완전한 새것이 아니라 '알아볼 수 있는' 새로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움은 마술적 효과와 같아서 나타나는 순간 '새것'과 같이 놀라움을 느끼게 하지만, 우리네 인식 구조로 보면 그것은 선취될 수 있는 비어 있는 자리에 무엇인가 채워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범대순 시인의 시론은 한걸음을 나아갔지만, 딱 거기까지임을 알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자연물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시어 구축에서 기계 문명의 인공물로 그저 대상이 대체되었을 뿐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론이 당대에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는지는 나로서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겐 그렇게 보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김춘수와 김수영뿐 아니라 수많은 (이제는 원로가 되거나 명예가 된)기성 시인들이 각자의 차이를 '어떤 시적 정황을 어떻게 다루는지'로 벌리고 있었다면, 범대순은 시적 대상물을 바꿈으로써 차이를 만들어낸 것으로 대비시킬 수 있다. 다만 '시를 쓴다는 것' 속에 결코 말해질 수는 없으나 거진 모든 시가 보여주고 있는 '감정' 표현에는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건, 기계 문명의 인공물들이 기존에 어떤 '감정'으로 자리매김했는지다.


 내가 느끼기에 자신의 창작이 어떤 새로움인지에 따라 여러 행보로 갈라지는 것 같다. 만약 당대 시대관에 반하는 것을 창작 대상으로 다루고자 한다면, 그는 기존의 가치 판단에 '의식화와 성찰화'를 제공하는 '시론'을 덧대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업을 사후 타인들이 자발적으로 해줄 수도 있다. 이상하리만치 한국에서 유명세를 탔던 랭보나 보들레르가 그렇다. 반대로 김수영 같은 행보라면 그는 시대와의 불화에 따른 적응이라기보다 시대와의 적응에 따른 불화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적응에 따른 '불화'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앞단에 '적응'에 대한 부적응에 애를 먹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추상적인 스케치는 디테일한 내용으로 들어가게 되면 다 소용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마 대부분은 여기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느낄 텐데, 나는 다르다.


 시대 관찰을 포기하지 않는 것. 거시적인 환경과 나라는 개인이 맺는 관계가 어떤 영향 관계를 갖는지 고민을 중단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나의 창작 여정을 이끌었다. 이것은 나에게 리처드 로티가 말한 '언어 창안', '재서술'이다. 어떤 이는 로티 말마따나 자신의 마지막 어휘를 찾기 위해 다른 데서 그 힘을 쓴다. 예를 들어 범대순의 경우에는 대학 시절 '불도쟈'의 공사 현장을 보면서 자신의 유년 시절 감명 깊게 봤던 '황소'를 이미지로 병렬시켰을 때 서로의 심상을 감정의 시구로 붙들기 위해 그 힘을 썼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가 힘을 쓰는 곳은 마찬가지 빈 자리의 언어다. 시인뿐 아니라 언어를 창작하려는 무수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 만의 마지막 어휘'를 찾고 고르기 위해 부지런히 재서술을 행한다. 다만 그중에서도 유달리 시인들은 '마지막'이 도래하지 않는 역설에 빠진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사무엘 베케트도 시인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그저 직업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닌, 언어를 창안하려는 (로티식으로 말하면)아이러니스트들이다.


 이들은 무수한 역설과 이율배반을 겪어내고 감당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융이 말하는 '시련'을 거치게 된다. 아마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무수한 작가들의 텍스트 안에 그런 시련을 거친 뒤의 내용이 유사하게나마 발견되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만 이것들은 아무리 뒤쪽으로 괄호쳐진 채 블랙박스처럼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당대의 시대와 연관이 있다. 오래된 텍스트를 읽는다는 건 역사적 인식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의 '동시대'를 보다 상대적으로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아주 진부한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여기에 왜 지금' 살아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비유는 이런 상황을 아주 쉽게 인식케 한다. 수중 생명체가 자신이 물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자신이 동시대에 있다는 걸 모른다. 니체 따위의 사람들을 데려와 '동시대의 불화'에 어떤 의미 부여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낭만성-진정성의 고양심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럽다. 문학 전반도 그렇고 비평도 그렇지만, '무엇을 쓸 것인가'는 필연적으로 '자신이 세계를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에의 반대 의견은 이성의 입장에서 무지이거나 합리화로 포착될 뿐이다. 왜냐하면 한 번 의식화가 되고 나면 그 뒤로는 더 이상 '모른 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돌이킬 수 없음이, 사실은 인간에게 주어진 죄이자 병이자 자유의지, 창작이다.


 범대순 시인 말마따나 '저항을 느끼거나 혐오감을 갖는' 건 어떤 병에 걸린 것과 같다. 그는 이 문구를 '기계 문명에 대한 편협한 관점'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래서 기계 문물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착취시키고 인간성을 말소시킨다는 일종의 악마화에 따른 저항과 혐오감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자신의 시대에 무지한 채 창작을 하는 모든 것에 적용되기 시작했던 게 15년도부터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병'이다. 이 돌이킬 수 없음으로부터 어떤 화해를 맺기까지 겪어야 하는 병이다. 나는 아직도 소위 젊은 시인이라고 세간의 주목을 받는 신인 시인의 시를 보더라도 저항과 혐오감을 느낀다. 그들이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독창적으로 시를 쓰는 일종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새로움에 대한 환대를 건넬 수 있다. 하지만 범대순 시인 말마따나 '시대가 요구하는 시', '시가 이끌어가는 시대' 간 교호 작용은 여전히 발견되지 않고 있다. 나는 이 문제가 시인에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즉, 시인의 역량과 능력이 부족해서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 기대, 요청을 건네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시뿐 아니라 여러 예술 행위로 여겨지는 창작물에게도 그렇다. 본인이 자처해서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과 누군가에게 아이러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건 한 개인이 시대상을 어떻게 그리는지, 그리고 싶은지에 따라 갈릴 수밖에 없는 관점이다. 또 여기에는 공동체, 집단, 대중, 사회와 문화 안에서 움직이는 인지와의 관계망도 연루되어 있다. 언제나 늘 그랬지만, 문제는 내용에 있질 않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에 있다. 이 문제가 양상을 달리할 수는 있어도 단 한 번도 핵심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시대는 관찰되지 않는다. 여기에 내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몇 개 없다. 나는 선취성에 특화되어 있고, 또 이 능력을 양보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추상 단계의 고도화 전략을 구축할 수밖에 없다. 김수영과 같은 행보를 취할 수 없는 이유다.


 … 액화하는 힘은 ‘체제’를 ‘사회’로, ‘정치’를 ‘생활정책들’로 바꾸고, 사회적 공존의 ‘거시적’ 차원을 ‘미시적’ 차원으로 끌어내렸다.

 그 결과 우리 시대는 개인화되고 사적으로 변한 근대, 유형을 짜야 하는 부담과 실패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개인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액화할 차례가 된 것은 제반 의존과 상호작용의 유형들이다… 하지만 유체를 하나의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많은 주의, 끊임없는 감시와 노력이 필요하다. 또 그렇게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그것이 성공할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 액체 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필로소픽, P. 46


 20대 때부터 나에게 가장 혼란스러웠던 건 이 시대를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였다. 나도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진정성'의 시대적 영향을 꽤나 깊게 받아들이며 살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구축된 가치관으로는 당대의 현상을 알아보지 못했다. 특히 퍼포먼스를 취하는 현상이 그랬다. 낭만성-진정성을 추구하는 이에게 퍼포먼스-연출은 소위 거짓, 가짜다.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읽은 체 하는 인간, 작품을 피상적으로 다루면서 마치 깊이 있는 것처럼 노출시키는 인간, 어떤 감정과 생각에 마치 자신 만의 독창적인 것인냥 뽐내는 인간 등. 이들을 향한 나의 저항과 혐오감은 고질병이었다. 나아가 반대로 나에게 이율배반의 무언가를 자극시켰다. 피상성, 소비, 이미지, 연출, 자극, 반응, 감각, 매력, 섹슈얼 등 그저 표면에만 있고 진정성 따위는 일절 없어 보이는 것들이 만연한 사회-문화에서 진정성을 추구한다는 건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아마 무수한 학자들이 이에 대해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대놓고 다루지 못하는 자신의 낭만성-진정성을 어떻게든 위치지우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이건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 현상을 두고 생각하기를 포기한 채 그저 사람에 따른 성향 차이, 혹은 개성, 가치관 등 개인적으로 다루며 퉁쳐버리는 건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부분이다.


 시대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을 하게 만드는지는 기본적으로 추적 불가능한 그림자와의 추적이다. 다만 모든 '거시'는 각 행위자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걸, 그저 거시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는 인식의 한계를 잘 살핀다면 일상을 추적함으로써 시대와 관계맺기가 불가능하진 않다. 또 그런 노력을 숨죽이며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이런 관찰 추적에 도움을 준다. 사회학 책들에서 심심찮게 통용되는 여러 개념들은 그중 좋은 도구다. 뮐러와 담브로시오가 말하는 성실성-진정성-프로필성으로 보든, 바우만의 고체-액체로 보든, 레크비츠의 보편-특수로 보든 그들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에는 우리네 삶이 있다. 엄격한 개념 사용을 위한 의미 차이의 분별-채택은 학자 본인의 마음이지만, 이들의 관찰이 그려내는 공통 분모는 개인의 마음들이 담길 수 있는 '거대한 그릇'을 그린다. 만약 이러한 시대관에의 상이 없다면, 20대의 나처럼 이율배반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왜 무엇을 추구하고, 좋게 느끼고, 새롭게 느끼고, 매력있다고, 독창적이라고, 예술이라고 느끼는지 혹은 그 정반대에 레크비츠 말마따나 '가치 박탈'을 하는지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관찰 불가능이 시대와의 불화에 따른 적응을 자극한다. 나에게 보이는 걸 사람들과 나눌 수 없을 때, 그 일상 속에 만연한 불화는 점점 확장되어 '당대'라는 부피로 확장된다. 그렇다고 이 차이를 해소하고자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어 소크라테스처럼 지적 산파술을 감행하는 건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는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여기에는 양보할 수 없는 어떤 가치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 시대마다 양상은 다를 수 있어도, 한 개인이 자신의 영향력을 아무렇지 않게 확장해도 괜찮다는 그 당연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이는 당대 용어로 자신의 개인성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산파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의 가치관일진데, 기든스 말마따나 '성찰성'이 과잉된 오늘날 '보여지는 자신에 대한 관찰'이 작동되지 않는 인간에게 도덕적 검열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성과 성찰성이 만나 형성된 가치관에 가깝다. 관찰 불가능에 따른 시대와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선 융의 조언대로 '의식으로써의 줄다리기'를 감행해선 답이 없다. 또 21세기 대도시는 우리에게 유연함, 경직되지 않음, 적응력, 꾸준한 업데이트를 요구하기 때문에 이에 맹목적으로 수긍하지 않으려면 더욱 불가능에 따른 시대 관찰도 불가피하다.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는 사실 너무 당연한 이야기가 된 것처럼 익숙하지만, 아직 우리네 일상에 잘 정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액체라는 대상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비유로 이해한 현상이 적절한 모델링을 가능케 한다면, 오늘날 유행하는 여러 개념들이 왜 '유행'하는지도 알아볼 수 있다. 신경 가소성이니, 도파민 중독이니, '뇌' 따위가 그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의식'을 표면 위에서 하기 때문에 표면을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러 이성 사용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처럼 사람들에게 표면을 '의식'하라고 요청하고 권고하는 건 받아들일 만한 방식이 아닌 것이다. 더 까다로워지는 방법이기는 해도, 결국 사람들이 무언가를 새롭게 의식하려면 그걸 위한 '표면'을 바꿔야 한다. 이 구조가 우리 인간에게서 잘 작동되고 있기 때문에 소위 기계 장치와 함께 가속화된 '진보'가 가능했다. '스크린'의 등장으로 이제는 너무나 만연한 이 구조가 언어로 설명되고 인식에 포착된다고 해서 전부는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의식하고 받아들이는 무수한 순간 속에서의 '표면'이 하나하나 모여 어떤 거시를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추적이 없다면, 바우만이 말하는 '액체화'가 사실은 우리네 정신 안에서 '버전'을 달리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전에는 전혀 불필요했던 정신 기능이, 그래서 딱히 발달될 필요도, 긍정될 필요도, 도덕적 미덕이 될 필요도 없었던 기능이 지금 부하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아마 거칠게 요약한다면, '액체 현대'는 과거 특정 시대관'도' 반영한 소위 잡탕일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소실된 것처럼 여겨졌던 수렵-채집민의 시대관은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성 지평을 확장했고,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만연했던 한국의 농경 공동체의 윤리관은 소위 1-2차 산업과 각종 자영업으로 여전히 '실재'한다. 덧붙여 21세기 대도시화, 매스 미디어, 인터넷이 맞물려 형성한 소위 3-4차 산업 내 일상은 우리네 삶 속에서 신조어로 갱신시켜야 할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이런 혼합 짬뽕 잡탕 개밥이 쉽게 말해 21세기 대도시로 본다면, 오바일까? 내가 느끼기론 이전 세대까지만 해도 서로의 삶과 가치관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잘 모를 땐 존중하기' 따위의 상대성이 먹혔다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상대성이 먹히는 게 아니라 진실로 정신 안에서 마치 버전이 다른 인격이 있는 것처럼 병렬되어야 하는 쪽으로 자극되는 거 같다.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는 '가속'은 내가 보기에 일종의 착시 효과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인격을 구축하며 어떤 가치관(그러나 그것이 어떤 역사적 계보 안에 놓여 있는지 모르는)을 가질 때 그에 맞지 않는, 혹은 달리 추구되는 무엇에 대한 거리 분의 시간이 가속으로 표현된다. 이전에는 인격 자체가 고정된 표면으로 다뤄지지 않았다면, 이제는 다루지 않고는 버티지 못할 거라며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가속주의를 비롯해 그 선배격인 노마드, 도주주의 등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2차 가공되어 피상적인 수준에서 주장되는 이런 관점은 범대순 시인이 기계 문명에 대한 이해와 관점 없이 그저 친화적인 접근을 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한걸음이다. 고정된 표면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즉 일상으로 보면 성실하게 사는 사람은 성실성을 포기할 수 없으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이는 가짜를 용납할 수 없으며, 소위 21세기 매스 미디어에서 살아가는 '피상성'의 정체성으로 보면 나머지 고정된 표면 위에서 늘상 도덕적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다. 공인으로 다뤄지는 연예인, 아이돌, 배우, 운동선수, 정치인, CEO 등이 맞닥뜨리는 도덕적 실패 이면에는 그들이 활동하는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재구축 혹은 발달시킨 인격의 그림자로 볼 수도 있지만, 당대라고 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건 한 인격을 고정시키지 말고 버전을 달리할 수 있는 유연함이다.


 이 요구의 진위 여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인간의 정신 활동을 관찰하면, 무엇에의 적응은 곧 그 대상과의 동일시로 인해 단계를 거쳐간다는 걸로 말미암아 유추해낼 수 있는 요구다. 공장이 찍어내는 무수한 제품 속에서 인간이 늘상 '신제품'을 소비하는 쇼핑 정신이 자신을 늘 새롭게 발달시키고 유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자기 계발'로 교호되는 건 엉뚱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성실함, 보편성, 인내, 자연 친화적, 농경 생활로 구축된 인격의 눈에는 이런 변화가 무척 빠르게, 따라잡을 수 없게, 거침없이 보일 수밖에 없다. 진정성, 낭만, 고유함, 본질, 진리, 진짜를 추구하는 인격의 눈에는 이런 변화가 얼마나 피상적이고 휘발적인지, 거짓이자 '죄악'인지 혐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안에서 벌어지는 긍정-부정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저 자신에게 맞질 않는다, 호불호가 갈린다, 취향이 아니다 따위로만 취사선택되는 걸로 퉁쳐버려도 괜찮을까.


 나는 당연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지만, 자발적으로 아이러니스트가 되는 것과 누군가에게 아이러니스트가 되라고 요구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이 모든 건 전적으로 내가 '창작' 활동을 어떻게 여기고, 또 어떻게 해나가고 싶은지의 문제다. 쉽게 말해 세계를 바꾸고 싶은 게 아니라 세계에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이건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20대 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에고 퍼포먼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자신의 고유성과 독창성을 연출하고, 큐레이팅해 주목과 매력을 누림으로써 자신을 예술가라고 자칭하는 것들에서 발생하는 이율배반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진정성이나 깊이 따위는 없는, 그저 애들 장난처럼 보였다. 특히 '시'에 있어서 깊이가 없다, 그저 가소로울 정도로 멋대로다 따위의 얘기들 앞에서도 그랬다. 나는 고여 있는 기성들처럼 '시'에게 깊이를, 고민의 치열함을, '시는 이래야 한다'를 주장하면 이런 고정성에 저항하고 혐오감을 갖는다. 또 자신은 마치 시대를 따라가는 것처럼 '젊음'을 생략한 채 그 반대를 주장하는 기성 시인들에게서도 저항하고 혐오감을 갖는다. 이런 서로 간 양립 불가능을 상대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도 거부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만한' 걸로 다룰 수 있을까? 이걸 제일 잘하는 사람을 한 명 꼽으라고 한다면 역시 셰익스피어이지 않을까.


 중요한 건 현실 앞에서 저항과 혐오감을 갖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자체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향한 재귀성을 유발시킬 수 있느냐다. 이 방향이 아니면 창작은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한 번 들어온 '진정성'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온갖 정신병리, 정신의학, 심리학의 고전들을 보더라도 '인격'에 한해 딱 들어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모델링을 제공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부분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어도, '우리 인간'에 적용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인간의 정신, 인격 따위는 여전히 블랙박스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인격별 버전을 달리하며 적응력을 꾀하는 게 과연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또 세밀한 일상 관찰을 보면 인간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예전부터 줄곧 보여주고 있긴 하다. 아무리 일관성 있는 인격, 일체감 있는 인격, 고정된 인격, 그런 삶 따위를 언어로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그런 '생물'은 애초에 있질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건 모두 '언어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다룰 때 줄곧 실수하게 되는 건 현실과의 대응을 간과한 채 현실을 앞질러 언어가 선취해버리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내가 극복하지 못한 온갖 불화들은 아마 이 '선취'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 간 가치 불화도. 그래서, 나는 왜 15년도부터 '비인간'을 좇았을까? 그건 이 시대가 계속해서 우리 인간을 관찰하라고 요구함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비인간들은 때로 불필요하게 지구상 온갖 대상들로 고민없이 다뤄지기도 하고, 때로 의심없이 인간의 그림자를 투사한 대상들로 다뤄지기도 한다. '비인간'의 자리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은 언제 나타날까? 너무 성급하게 유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인간이라는 키워드가 시대의 화두로 다뤄지면서 너도나도 여러 책을 내고 언급을 하는 분위기지만, 아직도 인간 아닌 것으로 다루지는 않는 모양이다. 나의 선취는 이렇게나 지독한 병이다. 언제쯤 이 시간차에 따른 소외감이 딱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기무라 빈의 용어대로 '축제'가 일어날 수 있을까?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 수행적 공간은 항상 특정한 분위기를 띤다. 벙커, 기차 정거장, 옛 호텔 건물과 같은 공간은 매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다. 공간성이란 행위자와 관객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이용뿐 아니라, 그 공간이 뿜어내는 특수한 분위기를 통해서도 생성된다. P. 255

… ‘실제 삶’에서 인간은 점점 더 관객처럼 행동한다. 어떤 폭력 행위를 목격하더라도—휴대폰으로 경찰을 부르는 것 말고는—자신이 개입하거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예술가들은 공연에서 관객을 단지 가만히 관찰하는 데 머물지 않고 스스로 개입하고 행동해야 하는 상황에 빠뜨리며, 관객 스스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든다. P. 379

- 수행성의 미학, 에리카 피셔-리히테, 문학과지성사, 2017

 

 21세기에는 분명 비인간의 분위기가 있다. 시대 통째로 이 공간에 놓여 있는 우리네 관객들이 분명 평범한 일상에서 목격하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나는 시를 쓺으로써 사람들이 무언갈 해야 한다고 느끼게 만들 마음이 없다. 다만 목격을 넘어 인지로 나아갔으면 싶다. 시가 그런 역할을 하는 데 적합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이율배반이 극복되는 순간 어쩌면 나는 더 이상 창작 따위에 내 삶을 갖다바치지 않을 것 같다.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걸 고려하는 건 이후의 문제다. 쉽게 말해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 이건 내가 추구할 수 없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불화보단 적응이 기본인 채로 살길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게, 최선의 도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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