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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와 돌멩이 Nov 14. 2024

팬텀 공간론_후기

작업 노트 27


24.11.14



'자기 자신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다.'


아마 이 문장은 누군가에게 무척 희미해 보일 것이다. 마치 '대략 54,000km 떨어진 시공간에 놓인 물체 A가 움직이고 있다'와 같은 느낌으로 읽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이웃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 온다…'나, '배가 고프다'같은 느낌도 있을 것이다. 반면 언어를 밀어내는 듯한 강렬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늘도 아비의 고함은 들려온다. 세상에서 지워졌으면 싶은 마음처럼 컴컴한 방에 갇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 있을 땐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하나의 웅크림이 있었다'같은 마음의 분리를 느끼는 것도. 


 언제부터 내가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있었는지를 더듬어 보면 아마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내야 했던 청소년기부터이지 않을까 싶다. 감정을 느끼는 나를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듯 관찰할 수 있는 의식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체험은 표현하기도 모호했다. 또 설명한다치더라도 그런 체험을 누군가에게서 동조받는다고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싶은 알 수 없는 고립감도 있었다. 어쩌면 이때 나타난 이런 기이한 '동시 체험'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복시複視'이지 않을까. 이것은 사람을 관찰할 때도 나타났다. 어떤 이가 감정적으로, 소위 비합리적으로 언행할 때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걸 보면 이상하리만치 불쾌했다. 그런 모습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놀다가 다치면, 아프기 때문에 울게 되고 통증이 가시면 잊고 지내다 어느새 아물었다. 상처는 흉터를 남길지언정 어떤 돌이킬 수 없는 불구로 이어지진 않았다. 내 정신은 자연스럽게 이를 학습해 크게 다친 날이면 다시는 그런 '순간'에 노출되지 않게 예상할 수 있게 됐다. 즉 한 번 다치면 다시는 같은 '다침'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는 한계를 넘지 않는 선에서 벌어진 일들이라면, 지금까지의 '아무렇지 않음'은 그럴듯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똑같이 정신적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나타난 일들은 시간이 흘러 아무렇지 않게 체화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 벌어진 일은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신체는 부분적으로 불구가 되어도 다른 기능 간 시스템에 문제가 없다면 여전히 유지된다. 하지만 새끼 손가락 마디 하나가 절단되는 일과 그에 상응하는 '크기'와 유사해 보이는 안구 하나가 망가지는 건 다르다. 그것을 불구로 만드는 데 필요한 압력에 별 차이가 없더라도 말이다. 


 정신도 이와 유사해 보인다. 문제는 신체와 달리 '도식화'가 지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며, 따라서 어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이것은 보는 행위로 자신의 눈 안을 들여다보려는 것과 같아서 거울 같은 장치나 해부 도면 따위의 대상들 없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문제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걸 모두가 '모르고' 산다면 결코 문제되지 않는, 그런 것이다. 지금의 나도 내가 어떤 정신 과정으로 이러한 생각들과 일상 살기를 하는지 그저 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식으로만 생각하는 게 최선이지, 이것이 어떤 의식되지 않는 무언가로 인해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의 가능성은 내게 주어져 있지 않다. 쉽게 말해, 나는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살 수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문제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세상에 없는 문제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이 동굴 밖 빛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림자만이 유일한 세상의 빛인양 살아가는 사람을 무지몽매한 것으로 여기는 건 세상에 없던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이라는 이름의 '계몽적' 빛이 되려면, 그 고통은 1차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나타나야 한다. 만약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다고 말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통의 인과과 요구될 수밖에 없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야기된 환경이 자신에게 고통인 것을 넘어 다른 이에게도 고통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을 전파시키는 데 필요한 건 결국 추체험으로라도 고통을 학습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멀쩡한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고통 전파를 자신의 행동으로 이끄는 사람들도 멀쩡한 사람과 고통스런 사람과 동일한 사람이다. 이런 개인들을 하나하나 긍정한다면, 그러니까 그들의 생명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하면 서로 충돌하는 자신들의 긴장된 관계 속으로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곳은 자신과 하나인 어떤 목적-지향성의 세계로, 행위자의 세계다. 그런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가 어떤 말과 행동을 했다는 식의 자극을 넘어 그것의 영향 관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영향 관계를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자신 또한 그런 영향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분화가 이뤄지면 자신의 언행에 그만한 분화가 이뤄진다. 마치 문학 작품에서나 볼 법한 문구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보는 게 곧 족쇄라는 걸 알아봤다' 따위다. 


 이것은 단순히 '아는 게 힘이다' 같은 말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더 알려고 할 때, 그 앎은 양면성을 띤다. 안영호 선생은 팬텀 공간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착각 운동의 예시를 든다. 만약 한 쪽 안구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시킬 수 있다면, 오른쪽으로 보려고 할 때 눈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보이는 장면은 어떻게 될까?에 대한 실험을 소개한다. 장면은 놀랍게도 오른쪽으로 회전하는 듯 움직인다고 한다. 운동의 상대성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왼쪽으로 회전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냉장고로 향할 때 나는 냉장고에 다가가고 냉장고 또한 나에게 다가온다. '지식'의 언어로는 내가 내 몸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냉장고는 고정되어 있어 냉장고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건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만약 나 자신을 조종하는 조종수라고 상상해 보자. 여태까지 나는 내 몸을 움직이는 데 '한 번도' 비정상이었던 적이 없다. 그랬는데 갑자기 냉장고로 향하려고 할 때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나는 조종을 하고 있기 때문에 냉장고로 향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이때, 놀랍게도 냉장고는 나에게 다가오는 게 아니라 멀어지는 것이다.


 앎은 양면성을 띤다는 건 이런 '착각'이 여러 도식 체계와 결합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꽤 많은 설명을 요구하므로, 일단 안영호 선생의 예시를 더 소개해본다. 도시에 사는 시민이라면 누구든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 무빙워크를 체험해볼 수 있다. 특히 에스컬레이터와 무빙워크가 이런 착각 운동을 잘 보여준다. 에스컬레이터의 경우 계단을 내려가듯 걷을 때, 하필 '앞을 보지 않고' 핸드폰을 보며 걸으면 도착 지점에서 순간 땅이 꺼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인도와 도로 사이에 깔린 연석이나 갑자기 낙차가 발생하는 지면 등에서도 쉽게 겪을 수 있다. 이 체험에 요구되는 건 우리가 몇 번째 걸음에 낙차가 사라지고 수평이 되는지에 대한 지각 정보가 없을 때다. 즉, 우리의 비의식은 자동적으로 '계단을 오르내린다' '평지를 걷는다'로 작동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저 걸을 수 있기 때문에 걷는 것이며, 이것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 다만 땅이 꺼지듯 '엇!' 하는 순간 즉각적으로 지각 정보를 받아들여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며 수습을 하고 넘어가는 식이다. 


 이런 예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그 '순간'이 바로 팬텀 공간이 '노출되는' 순간이다. 단순히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해서는 나타날 수 없는 순간이다. 또 의식하지 않음에도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자각 없음'도 무언가 설명되지 않으면 참 이상한 일이다. 이것을 만약 누군가가 그렇게 발을 헛디디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으로 상상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가 왜 발을 헛디뎠는지, 또 헛디디고 나서 무얼 할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로 인해 인명 사고가 발생하거나 그런 민원을 접수받은 담당자라면 엔지니어와 고민을 해야 할 수도 있다. 그들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발을 헛디디지 않을 수 있을까?'로 잡힐 것이다. 원인은 사람에게서 찾기보다 환경에서 찾는 게 쉬울 것이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찾는다면 사람에게 걷는 법과 계단을 오르내리는 법을 다시 교육시킬 것인가? 다리를 사용해 '이동' 중일 때 주의력을 앞으로 고정시킬 것을 어떻게 학습시킬 것인가? 따위의 어이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발을 헛디딜 수 있다는 게 만약 문제라면, 그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는 것보다 지면의 구조에서 찾는 게 좀 더 해결이 쉬울 것이며 또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는 데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부주의해서 나타난 문제를 왜 사물 탓을 하며 바꾸려 한다는 식의 문제 제기를 한다면, 그것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더 편할 것이다.


 안영호 선생이 팬텀 공간에 대한 예시로 든 '헛디딤의 순간'은 내가 보기에 '팬텀 공간'이 드러난 순간과 더불어 만약 그것이 문제가 되어 나타난 현상에도 과연 사람들이 그 문제를 알아보거나 다룰 수 있을까?에 대한 예시로 좀 더 확장한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안영호 선생이 '가설 체계'로서 대담하게 제시한 '조현병'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이야기를 다룰려면 좀 더 신중해야 할 것이다. 나도 언젠가 때가 되면 워쵸프의 책도 그렇고 안영호 선생의 팬텀 공간에 대한 나름의 해설을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아니다..





  

팬텀공간론 표지


 위에 든 착각 운동의 예시 그리고 우리가 어디선가 심심풀이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여러 '착시' 이미지들은 대개 지각 심리에 대한 실험들로 인해 발견된 어떤 '인지의 틈'을 '의식'할 수 있게 고안된 것이다. 즉 어떤 것들은 실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발견하기 쉽고, 어떤 것들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안영호 선생은 이걸 '심리'로 확장했다. 그리고 그 '(시)공간'을 가정한 것이 바로 '팬텀 공간'이다.


 언젠가는 해당 내용들을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게 정리하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므로, 대략적으로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위험을 멀리서 본다'는 것은 실은 '위험을 예감한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공간적 거리는 그것이 가까워지기 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의미한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멀리서 본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양은 일정한 거리에서 호랑이를 본다. 그 호랑이는 '약화되고 축소된' 호랑이 경험이다. 이는 피부로 접촉했을 때의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호랑이 경험'에 비하면 훨씬 약한 '호랑이'이다. 하지만 그 약함 속에는 내버려 두면 곧 강해질 것이라는 예감이 포함되어 있다. 영양은 그러한 상황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단계에서 즉시 도망간다(이것은 워코프가 사용한 예시이다).

이 생명력 넘치는 공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실체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독립적으로 나타나거나, 상실되었을 때, 즉 병리적인 상황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치 환상 사지(phantom limb)가 당사자에게 전적으로 실체적인 것처럼. 이와 유사하게, 나는 이러한 의미의 공간을 팬텀(phantom)이라고 부르며, 팬텀 거리, 팬텀 기능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일반 감각 공간에서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실체를 하나의 독립된 기능으로 생각한다(이것이 바로 팬텀 기능이다). 

팬텀 기능은 마치 영사기에 있는 렌즈의 기능처럼 그 이미지를 일정한 거리에 유지하는 데만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한다(우선 이렇게 생각해 보자).

(그에 대한 효과로) 정상적인 경우에는 안전하고 바람직한 대상에게는(관심과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접근을 허용하고, 위험한(너무 강렬한) 대상은(경계와 방어적 행동을 동원함으로써) 밀어내면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조절하여 전반적으로 거의 일정한 적정 거리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그 거리는 아마 개체에 따라 정해진 특정 특성 상수일 것이다).


 '팬텀 공간'이란 우리 인간 정신에 내재되어 있는 메타-인지 시스템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했을 때, 그 '본다'는 행위가 우리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내는지에 요구되는 시스템이다. 예를 들어 내가 골목을 산책 할 때 집집마다 달려 있는 가스 계량기나 가스 파이프의 배열을 관찰하길 즐겨한다면 아마 대다수의 행인들에게는 어떠한 인식도 자아내지 않을 것이다. 이 차이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조건(인식을 할 수 있고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기능적 조건)의 다른 사람들이 놓였을 때 제각기 자기가 본 것을 말하는 것과 같은 차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단순히 '다르다'는 것으로 퉁쳐도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각기 다르기 때문에'라는 말로 한 사람의 어떤 언행이든 갖다 붙여도 상관 없다는 식은 문자 그대로 (무관심한)상대주의다. 하지만 만약 어떤 이가 본 것에 관심을 갖고, 또 그가 본 것에 대한 체험에 주의를 기울인다고 했을 때 우리는 그가 어째서 그것을 볼 수 있었고, 왜 하필 다른 게 아닌 바로 그것인지 당사자의 체험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건, 우리의 정신에서 무언가를 보고, 표현하고, 또 그것을 추체험하는 데 어떠한 어긋남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팬텀 공간'을 딱히 의식할 필요도 없고, 문제시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이런 팬텀 공간을 그려낼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심리적 거리'란 이름의 공간을 의식할 때다. 여기서부터는 단순히 정상인-정신병 환자 따위의 구분이 아니라 '팬텀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팬텀 기능이 의식 기능과 일치하고 있는 상태를 A사람, 팬텀의 기능이 단축되거나 의식 기능과 일치하지 않는 상태를 B사람이라고 가정해 본다. A사람들은 자신의 팬텀 공간을 대체로 자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신이 느끼는 것, 심리적 거리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감정, 느낌, 분위기, 감각, 생각, 의심, 표상 등 온갖 것들을 발산하는 데 의식과 팬텀 기능에 어긋남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안영호 선생의 가설에 따르면, 팬텀 기능은 본래적으로 자각되지 않는 체계다. 그의 예시는 이해가 쉬워 재밌는데, 팬텀 공간을 자각하라는 건 마치 당뇨병 환자에게 지금 자신의 인슐린 농도를 파악하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다만 환자가 만약 A사람이라면, 자신의 신체 도식과 팬텀 도식, 지각 도식 간 일치가 이뤄지고 있을 것이므로, 입이 마른다거나 현기증 등 어떤 몸의 이상 증상을 통해 어림짐작으로 유추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발의 헛디딤'과 같이 A사람들 또한 어느 순간 자신의 팬텀 공간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자각 불가'는 그것의 구조적 역동이다. 즉 A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거나 불편함을, 또 '자기 자신'과 '타인'을 분간할 때 등의 느낌은 마치 '차가운 물에 손을 넣으면 손이 차갑다'와 같은 말이다. 그들은 그것이 '차갑기 때문에 차가운 것'으로 체험한다. 


 만약 B사람에게 팬텀 기능이 단축되어 이상을 초래한다고 했을 때, 그것을 본인이 자각하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에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워쵸프의 예시를 안영호 선생은 매우 좋아하시는지 자주 인용하는데, 만약 영양이 호랑이에 대한 팬텀 감각이 없다면, 그래서 호랑이에 대해 어떠한 의미부여도 할 수 없다면, 영양은 멀리 있는 호랑이든 가까이 있는 호랑이든 딱히 상관없는 호랑이일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호랑이'가 영양에게 어떠한 의미인지의 팬텀 공간화가 작동되지 않은 것으로, 비록 목숨은 한 번이지만 영양은 운이 좋게도 그것을 자신의 체험으로 배울 수 있다. 즉, 호랑이가 자신의 생명에 위협적이라는 걸 말이다. 여러 동물에게서 관찰할 수 있는 이러한 '인식 체계'가 만약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들의 세상은 불가했을 것이다. 반면 만약 팬텀 기능 자체는 있으나 그것이 이상을 초래하는 것이라면, 영양은 호랑이를 보지 않고도 자신을 호랑이로 느낄 수 있다(이것은 그저 무의미한 상상일 뿐이다). 동일하게 B사람이 차가운 물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양상의 분포는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할 법한 예시라면 아마도 차갑다=외롭다로 환유되는 어휘로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느끼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을 할 수도 있고, 차갑다=눈초리=벌을 받다로 환유되는 어휘로 벌을 받는 일종의 처벌 명령이 환청으로 들려올 수도 있다(당연히 이런 예시는 무의미한 상상일 뿐이다).


 안영호 선생이 조현병 환자들의 망상이나 사고 장애, 인격 장애 등을 '이해 불가'가 아닌 '이해 가능'으로 이끌고자 '기구 가설'을 제안한 것은, 그만큼 그들의 언행이 몹시도 불가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이웃이고, 가족이고, 친구이자, 정당한 인권이 인정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 같은 언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한다고 했을 때, A사람들은 그것을 A사람답게 받아들이려고 온갖 노력을 하지만 좌절과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마 오늘날 인터넷에서 심심찮게 별별 인간들이 툭하면 '조현병이냐?' 같은 식의 말을 내뱉는 걸 보면, 뭐... 범죄나 '이상'의 낙인화는 고대부터 있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면서도 같은 인간으로서 좀 좆같긴 하다. 앞서 글을 열면서 의식 분화를 얘기했지만, 의식이 분화된 인간들은 의식이 분화되지 않는 인간들의 폭력성을 마주할 때 늘 어떻게 하면 이 문제가 애초부터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현실의 최선이란 걸 받아들인다. 안영호 선생이 '팬텀 공간론'을 현실에 내놓은 건 바로 그런 이유도 있다. 그 전까지 사람들이 발달 장애니, 인격의 미성숙함이니, 어떻게든 A사람으로서 '만들려고' B사람을 어떤 주형틀에 넣고자 시도하는 게, 이해에 도움되지도 않을 뿐더러 B사람을 낙인 찍는(마치 일반 사람이 '조현병 걸렸나' 따위의 말을 심심찮게 할 수 있게 된 것처럼) 현상에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이 조현병 - 일본에서는 통합실조증으로 전환된 것도 그러한 편견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는 의도를 포함한 것이겠지만...)


 A사람과 B사람을 '같은 정신'으로 가정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 정신의 특징이자 한계다. 즉,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팬텀 공간은, 바로 그러한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출발을 가능케하는 보조 시스템, 그러나 자각되지 않기에 '메타'적으로 기능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분명 역동적이고도 복합적이라 따로 떼어놓고 다룰 순 없으나, 여기서부터 '만약……'이라는 말로 가정의 징검다리를 건너며 그러한 팬텀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때 정신은 과연 어떤 양상을 나타낼까,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A사람이라면 당연한 것들이 어떻게 달라질까? 그 이론적 시도를 한 것이 바로 '팬텀 공간론'이다. 정신의학자, 특히 조현병을 주로 다루는 현장 사람은 아니기에 잘은 몰라도 아마 이것은 세계 최초의 조현병 이론이지 않을까 싶다. 그 전까지는 현장의 최전선에 있는 학자들의 입에서 '결코 합의에 이를 수 없는……' 난해의 최고점에 있는 게 바로 조현병이라고 막막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걸 예상하면 그렇다. 팬텀 공간론이 최전선의 학자들에게, 또 현장에 있는 의사들에게 어떤 실효성을 자아내고 있는지는 나로서 잘 모른다. 다만 이 이론의 힘은 그 전까지 우리네 정신에서 어렴풋하게 만져지던 모종의 '작동'을 보다 구분되게 느낄 수 있도록, 이해의 길로 이끈다는 점에서 강력하다. 


 이것은 나에게도 너무나 큰 영향을 자아냈다. 특히 우리는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서 자기 정신을 갖고서 살아가는데, 21세기 현대라는 건 분명 어떤 경향성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존의 '개인'을 보다 강화시킨 방향, 억지로 말해 '초개인'이다. 트렌더들이 운운하는 '초개인'은 너무 가벼운 내용이지만, 또 그들은 인간학적 이해에 어떠한 관심도 없어 그저 서울 시민 900만 명 따위와 같은 느낌으로 양적으로만 '초개인'을 말하지만, 안영호 선생이 말하는 '초개인'은 분명 우리 앞에 놓인 숙제와 같다. 슬로터다이크의 '면역이 강화된 개인'이나 여러 사회학자들의 개인화-노마드-액화-아노미 상태-단독성 등등은 분명 어떤 등대의 불빛을 겨냥하고 있고, 그 등대를 안영호 선생 또한 응시했다. 즉 우리 앞에 놓인 시대는 곧 우리 자신이 스스로 자신을 영위할 수 있는(밖에서 더이상 우리에게 어떠한 신뢰나 안정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특수성 때문에 발생하는 상대성으로) 정신 상태의 분열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안영호 선생은 아마 농담은 아니겠지만, 그 상태는 분명 원격에서 컴퓨터로 인해 지시나 명령을 받는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SF적 가십이 아닌 정신병리의 현장에 있는 사람의 인간학적 이야기라는 걸 감안하면 플루서가 말하는 '소름끼침'의 다음 단계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시대적 자장 속에 유영하는 나로서 '팬텀 공간론'에서 얻어가고자 하는 건, 바로 '나'의 이해와 더불어 어떻게 하면 '자기 자신을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데에 있었다. 아마 이는 선배들의 어휘를 빌려 실존이나 무, 공허나 허무, 무의미, 베케트식 '끝장-부조리' 등으로도 매만져지는 것이겠지만, 로널드 랭의 사적 삶을 상상하며 나는 이 문제를 반드시 풀어야만 한다는 '생존 본능'이 건드려졌던 것이다. 그 여정 속에서 내가 붙들고 있는 도시-비인간은 분명 B사람들과 관련이 있다. 안영호 선생이 팬텀 공간론 말미에 '분열기질자'들의 정신을 패턴 B의 우위라고 말하는 대목은 정확히 나의 직관과 동일했다. 다만 나라는 인간 입장에서, 그러니까 '나 자신으로부터의 출발'이라는 (너무나 희미해지고만)절대절명의 순간에 있어 풀어야할 숙제는, 어떻게 나로서 그러한 정신의 안정화를 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여러 증상으로 발현되고 말아버린 B사람들의 면모를 통해, 그러한 정신 구조적인 면모를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부터 출발해 무언가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면 나는 그 희망을 결코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증상들 속에는 분명 우리의 정신 기능 또한 담겨 있으며,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가 버리지 않았는가? 따위의 상대성도 중요하지만, 그로인해 미약하게나마 '나는 어째서 이러는가?' 따위의 특수성도 더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안영호 선생은 중간에 '코페르니쿠스적 관점에서 프톨레마이오스적 관점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사회문화에서는 당연히 지구가 도는 게 과학적 진실이다. 그 전까지 사람들이 천동설을 믿었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과학사를 다루는 여러 학자들, ANT이론으로 분류되는 몇몇 학자들의 흥미로운 과학사 논쟁 저서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지만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어떤 인식 태도가 나타났을 때 그것이 전복되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현상이다. 특히 오늘날 '인간중심주의' 운운하며 '비인간' 존재들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나의 감수성으로는 마치 B사람들을 A사람들의 입맛대로 다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상에 천동설 뿐이라면 천동설을 믿는 데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이고, 세상에 지동설 뿐이라면 지동성을 믿는 데 어떠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워쵸프 말마따나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A->B라면, 세상에 지동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천동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라투르의 '야누스의 얼굴'도 마찬가지지만, 나로서는 워쵸프가 좀 더 진실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건 바로 ->에 있다. 즉, 우리는 천동설을 '체험하면서' 지동설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게 보다 올바르다는 말이다.


 도시-비인간도 마찬가지다. B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조현병-통합실조증의 현장에서 그 동안 없었던 건 바로 '설명할 수 있는' 도식이었다. 그것을 안영호 선생이 제안했을 때 그것은 실로 수많은 B사람들의 언행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느끼게' 돕는다. 도시-비인간은 어떨까? 나는 우리 인간들이 수많은 기계 장치들, 인공물에게 어떠한 '체험'도 하지 않는다는 구조를 보며 B사람들과 상반된 양상이 나타남을 연결한다. 만약 라투르 말마따나 인공물이 우리 인간의 어떤 (행위)프로그램을 위임시킴으로써 그것에 더 이상 어떤 관심도 주지 않도록 설계된 '블랙박스'라면, 그것은 마치 우리의 '발 헛디딤'과 같이 우리 팬텀 기능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나는 이것을 비의식이라는 말로, Affordance라는 말로 계속 매만지고 있다). 내가 그동안 시로 쓰려고 붙들었던 일련의 세월 속에서 맛봤던 여러 나의 정신 상태들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다. 분열기질자가 패턴 B의 우위자라면, 역시 B 대상들에게 더욱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데 하필 내가 의존하려는 B 대상들은 그러한 의존을 '수동적'으로만 허용했다. 내가 그동안 느꼈던 무의미는 어디서 비롯되었던가. 실존적 무기력증이라고 굳이 표현했던. 로널드 랭의 '분열된 자기'를 보며 그렇게나 공감과 위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그런 정신의 '상태'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이길래, 그런 양상으로 나타났을까, 돌려 말해 B사람들이 겪는 '이중성'을 스스로 자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엇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구조지워졌을까.


 이 비밀을 그 누구도 풀어내지 못했다는 것을, 나는 절망으로만 느끼지 않았다. 물론 내가 못찾은 걸 수도 있다는 식의 희망뿐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동안 어떤 방식으로든 이걸 풀어내고 싶다는 나의 의지를 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조차 나의 정신 패턴, 팬텀 기능과 맞물린 어떤 역동의 총체라 해도, 그것은 더 이상 '만들어진' 감각이 아닌 '주어진' 감각이다(이로써 나는 차분히도 처참했던 플루서의 명제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다). 


 팬텀 공간론을 오롯이 다 이해한 상태는 아니다. 이제서야 한 번 봤을 뿐이다. 재독을 당연히 해야 한다고 느껴진다. 다만 안영호 선생의 저서는 그런 방향이 아니라 


‘원 착상’의 모호한 성운 속에서 점차 분화되고 정련되어 정착되는 과정 자체에 있다고 하는 나의 느낌에 기인한다. 또한 한때는 버려지고 극복된 것처럼 보였던 오래된 착상의 일부에서, 의외로 다시 주워지고 정련될 보물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것이다.


 즉, 그는 체험의 '맛'을 아는 사람이었고 다른 글에서 밝힌대로 '질적 기하학'을 구사한 사람이었다. '팬텀 공간론'은 '팬텀 공간론의 발전'을 다 읽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한 바퀴를 돌았을 때 비로소 다룰 수 있는 내용으로 보인다. 그 전까지는 알쏭달쏭하다. 맞는 거 같으면서도 도식을 보면 속으로 '쌤... 왜 또 혼자 앞서가...'하는 뒤쳐짐을 느끼면서도 일단 따라가면 또 '아 그런가' 싶고 그렇다. 본인도 그걸 알아서 16년에 걸쳐 글을 쓰셨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배운 태도이기도 하다. '성급할 것 없다'. 14년도에 읽은 기형도의 산문에서 내 머릿속 깊히 박혔던 '힘을 아껴'가 이제서야 '이해'된다... 패턴.


 아마 언젠가는 나와 같은 정신 기질의 사람에게, 이런 내 삶의 분투가 거름이 될 수 있는 글을 남기고 싶다. 세상에 분명 그런 사람들이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만, 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느껴져 '같지만 다른' 느낌 때문에 오롯이 도움을 받을 수 없는지에 대해서도. 내 정신의 가장 큰 장점이자 특기는 아마도 인식의 배려다. 나는 이에 대해 완숙했다고는 결단코 말할 수 없지만, 그런 자질이 있음을 느낀다 = 내 정신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를 지향한다. 


 팬텀 공간론을 향한 여정이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다. 혹시나 해서 일본 출판사에다 문의를 남겼는데 절판된 책은 구할 수 없게 됐다. 안영호 선생이 생전에 홈페이지를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때는 내 세상에 없던 사람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이제 막 생명을 발산하기 시작한 군인이었다(환경의 역설...). 한국에서 그의 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반가울 거 같다. 한국의 정신의학 전문의들께서 어떤 이론적 위치에 있는지 아는 바가 없어, 이런 일본 정신의학계에 대한 접점이 어떤지도 아는 바가 없다. 만약 누군가와 안영호 선생의 이론 또는 워쵸프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나눌 수 있다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는 A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나의 팬텀 기능이나 정신 기능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아직은... 그럼에도 분명 무언가가 어긋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또 어떤 의식에 의해 이것이 '문제'로 다가오는지는 나의 숙제다. 시라는 이름의 예술에 내 삶을 걸고 있다는 게, 어쨌든 정신의 가능한 희망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선 어떠한 의심도 없다. 만약 내가 가닿을 수 있다면, 안영호 선생에게 화답으로 보내주고 싶다. 팬텀 공간론 말미에 그는 이런 의문을 '차세대'에 던졌다.


일종의 '초자율성'이 요구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는 현실 자체의 허무, 아노미, 모든 가치의 상대화와 급변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으로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인관계의 이상도 이에 맞는 것이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지탱하는 것은 과연 새로운 종교일지, 예술일지, 아니면 더 넓은 '지식'일지? 


 결국 아타루가 말한 것과 같은 '도박'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글렀다'고 느끼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해 온 게 누군가에겐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는 없다. 나는 못할 거라는 예감이 더욱 강하게 밀려오는 밤이다. 팬텀 공간이 꿈틀대는 밤이다. 나의 언어로 말한다면... 한 발의 사과가 떨어지는 밤이다. 팬텀 공간론을 읽은 독자로서 이 말은 남겨두어야겠다. 현대인의 무기력은,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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