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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렌파크 Sep 18. 2020

8월만 되면 크리스마스

Chicago


말버릇처럼 8월만 되면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야!"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헛소리를 지껄이곤 한다.

빨리 연말연시가 되어 하루빨리 한 해가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아마도 나이를 먹는 것보다 무료한 생활이 극도로 싫었는지 모른다.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며 자라온 세대다. 사실 오래된 영화임에도 아직까지도 연말연시를 대표하는 영화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화이니 세대 구분을 할 필요도 없지만, 나에겐 미국을 대변하는 영화이다. 하물며 지구 반대편 아일랜드에서조차도 "나 홀로 집에"를 보며 크리스마스를 보냈으니 어디에 있던 막연하게 연말연시를 미국에서 보내겠노라! 무언의 결심을 하곤 했다.






2017년 크리스마스이브

나의 들뜬 마음과는 다르게 23일부터 시작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기상악화로 결항・지연되는 초유의 사태 속에 어찌 될지 모르니 일단 짐을 챙겨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될 만큼 날씨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기약 없는 대기를 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커졌다. 역시나 대부분의 항공 스케줄이 캔슬이 되었고, 남은 항공 편들도 기약 없는 지연의 연속이었다. 사실 항공 스케줄 보드판을 보지 않아도 복도며 의자며 노숙하는 사람들과 실랑이에 목소리를 한껏 높이며 삿대질하는 진상 승객들로 인산인해, 시장바닥이 따로 없었다.

"왜 10시간 넘게 지연된 중국/일본행 비행기는 출발도 하지 못하는데 먼저 시애틀행 비행기를 보내냐!!"며 억지 부리는 사람들을 뚫고, 한두 시간의 짧은 지연에 감사하며 시애틀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관계자의 말을 빌어 보자면 중국, 일본 행 비행기는 출발지부터 기상악화로 우리나라에 오지 못해 출발 일정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제 시작이다.

세계 곳곳 많은 여행을 다니면서도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찌나 멀고 멀었던지.

십 대 시절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보고 막연히 시애틀을 가겠노라 마음먹었으니. 그 당시에야 무슨 사랑을 알고 그 알싸하지만 달콤한 운명의 기적을 알리 만무하다.

 그렇게 나의 여행의 반은 영화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며칠 전 알게 되었다. 예민하고 눈치 백 단인 나도 나 자신을 살피는 데는 무딘 것 같다.



시애틀(Seattle)


입국 심사에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그 어느 곳보다 따뜻했던 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했고, 무난히 나를 설명("여행자이고, 혼자 크리스마스를 미국에서 보내고 싶어!")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에 첫발을 내 디뎠다.

친절한 직원들이 많고 여행자들이 한 번쯤 들를 법한 핫한 호스텔을 예약했고, 역시나 "나 여행객이에요!"라고 뽐내기 좋았으며 가격도 저렴하며 미국적인 느낌을 물씬 느낄 수 있는 녹색 거북이 호스텔로 향했다.


공항에서 다운타운행 LINK를 편리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애틀 시내에 내려 지상으로 사뿐사뿐 올라갔다.


Shit! 뭐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깨끗한 링크(공항과 다운타운을 잊는 지하철)에서 내려 거리로 올라 오자 마자 낭만이 가득할 나의 미국이, 매캐한 담배 연기와 쌉싸래한 향에 흠뻑 취한 비렁뱅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느리적 느리적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 더러운 기분. 무서운 것인지 불쾌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종종걸음은 이내 무거운 짐을 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뒤도 돌아볼 여유 없이 허겁지겁 도착한 호스텔은 따스했고 스르르 몸이 녹아 버렸다. 그렇게 시차 적응은 꿈도 꾸지 못하고 바로 단꿈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애틀을 즐겨야 해!’

여행지에서만큼은 세상 여유롭고 베짱이 마인드인 나는 부리나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잘 먹고, 쇼핑도 하고, 그 비렁뱅이들을 째려보며 걷는 배짱도 생겨 버렸다. 아마도 총보다는 거지들이 안전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

(한국에서 크리스마스이브에 출발하여, 여전히 미국의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있는 시간 여행자)

나에겐 록펠러 센터의 크나큰 트리는 없지만, 낭만의 도시, 커피 향이 퍼지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온몸으로 느끼는 밤이다.





시카고(Chicago)


원래도 추운 곳으로 유명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던가. 유난히도 추운 시카고의 겨울에 연일 북극한파의 맹위가 수그러들지 않아 미디어의 헤드라인의 메인 기사가 되었고, 화성보다 추운 지역이라는 기사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시애틀에서 2시간 연착으로 더 늦은 밤에 도착하게 된 시카고 오헤어(O'Hare) 국제공항은 밖을 나가기도 전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타게 된 블루라인의 메트로. 추위와 시키고만의 으쓱한 분위기에 압도 당해 몸이 얼다 못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온도와 시간이 나를 감 쌓다. 먼 깡으로 이 밤에 혼자 캐리어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했는지.

메트로 블루라인은 24시간 운행이 되고 있지만 혼자 9시 이후로는 절대 추천하지는 않는다.(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이나 그냥 무섭다. 참고로 난 겁이 너무 없음에도.)


나와 마주한 추위와 두려움이 가시기 전 어렵사리 도착한 숙소의 경비원은 무관심으로 일관했고, 문 앞에 서 있으면서도 문조차 여는 법을 알려 주지 않은 이기적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다행히도 도착시간임에도 오지 않는 내가 이상하여 이내 담당자가 문 앞으로 나를 찾아 나왔고 나에게 카드키를 건네주며 앞으로의 시카고 선배가 되어 주겠다는 말에 나에게도 의지할 곳이 생긴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의 홈 메이트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내 방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제는 나의 카드키로 마음껏 들어가게 된 이상 이 세상 가장 따뜻하고 멋스러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처음 살아보게 되는 아파트/공장 형 숙소인 “Automatic lofts”는 시카고 대학생들이 머무는 숙소라 대학 기숙사를 대리 체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각 1인 1실을 쓰며 공동 주방과 거실을 4명이 사용하게 되는 나에게는 괜스레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숙소 그 이상이었다.


배낭여행으로 혼자 여행할 수도 있겠지만 2주라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도 잘 활용해 보고 싶어 한 어학원을 선택했다. 첫날 오티를 시작으로 오전에는 어학연수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어학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시카고 이곳저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매일 밤마다 주방 식탁에 삼삼오오 앉아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거실 맨바닥에 철퍼덕 앉아 시시콜콜하게 남자 친구, 여자 친구 이야기. 조금은 무거웠지만 살아온 환경과 종교 등, 때로는 천편일률적이긴 했지만 자신의 나라를 대변하고 뿌듯해하며 나누던 새로운 이야기들은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흥미로운 나날들이었다.  



뉴욕(New York)


연말이 되었다.

시카고도 너무 좋았지만 이대로 보내기가 너무 아쉬워 이틀 전날 무작정 뉴욕행 항공권을 끊었다. 2017년 마지막 볼 드롭 행사와 2018년 카운트다운을 지척에서 바라보았고, 뒤늦은 시간이지만 드디어 록펠러 센터 앞의 커다란 트리도 내 눈으로 직접 바라보았다. “나 홀로 집에” 서처럼 엄마와 가족을 찾아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릴 필요는 없었지만, 그토록 바라던 연말연시에 나는 뉴욕에 서 있었다.

덤보 지역에서 맨해튼 다리를 배경 삼아 분위기 있게 찍어 보려 했으나 한파에 얼어버린 손으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조차 어려운 날씨에 브루클린 브릿지만 어렵사리 구경하고 돌아와 숙소 방에서만 뉴욕을, 그리고 밤이 되면 매일 찾아가던 바에서 맥주 한두 잔으로 목을 축이며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이 멋진 여행이 된 것만 같은 짧지만 강렬한 한 겨울밤의 꿈처럼 첫 뉴욕을 느꼈다.



다시 돌아온 시카고는 그 짧은 시간임에도 나의 집처럼 따스했고 벌써 그리움의 도시가 되고 있었다. 한 주의 시간이 남았지만 떠나기 싫은 아쉬움을 제외하고는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각종 총기 사건과 강력범죄가 도사리고 있는 도시 분위기지만 그저 여행객에게는 두툼한 피자와 재즈 선율로 기억될 윈디시티(바람이 많이 불어 붙은 별명)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오늘도.

어쩌면 12월의 크리스마스가 곧 돌아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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