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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렌파크 Oct 28. 2020

끝나지 않은 산티아고 순례자 길 - 까미노 블루

까미노 위에서의 행복


'산티아고 순례길은 무슨 의미였을까?'

'떠나고자 했을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지?' 되뇌어봐도 특별할 것이 없었다.

종교적인 믿음이 있던 것도 아니고 꼭 가야 할 이유도 없던 그 길을. 지금은 그때의 감정이 어땠는지도 지난 일기장에서 찾아봐야 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에도 요즘 산티아고 순례길 앓이를 하고 있다. 코로나 블루가 아닌 까미노 블루("까미노" 길을 의미 + "블루" 우울증, 후유증을 일컫는 말의 합성어)를 앓고 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낭만의 파리(Paris)를 뒤로하고 나의 설렘의 시작, 생장으로 향하던 모든 순간들을 카메라로 닮았고 그 흔하디 흔한 기차에 앉아 바라보던 프랑스의 고즈넉한 시골 풍경까지도 새롭게만 느껴졌다. 바욘에 도착하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순례자들을 알아보게 되었고, 남들을 따라 목적지도 모르는 작은 2량짜리 기차로 갈아타고 드디어 생장에 도착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 마음을 한번 가라 앉히고 천천히 시작하자! 생장(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며칠 쉬고 출발할 것이라는 나의 계획과는 다르게 도착한 다음날 바로 길을 나섰다. 급한 성격이 또 한 번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산티아고 순례길(800km의 프랑스길), 활기찬 나의 2020년의 멋진 여행이 되고자 그 무거운 나의 업보(자신의 몸무게의 15%, 최대 20%를 넘지 않을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나는 그 무게를 훌쩍 넘는 12kg에 육박하는 묵직한 배낭을 들었다)를 들고도 씩씩하게 한발 두발 내 걷고 또 걸었다.


"첫날은 이게 뭐람. 이렇게 쉽다고?" 

겨울철 까미노라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없어 우회로인 발카로스 루트로 향했고 짐을 날라 주는 서비스도 운영을 하지 않기에 중간 기착지로 발카로스에서 쉬기로 결정했다. 무심결에 늦게 출발한 길이지만, 12km의 짧은 거리와 첫날의 의지 넘치는 발걸음 덕분인지 3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걸음과 함께 첫 까미노를 마무리했다.


둘째 날, 아직은 이정표를 보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고, 길이 갈라지는 포인트에서는 이정표마저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핸드폰 지도를 켜고 찾고 또 찾아보며 길을 걸었다. 수만,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걸었을 그곳, 목적지의 지표가 되어 준 이정표마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나란 사람. 무엇이 그토록 믿기가 어려운 것인지. 반성에 또 반성. 그럼에도 나의 빠른 걸음걸이는 가장 선두 쪽에서 나서게 되었고 먼저 도착한 알베르게 앞마당에서 마냥 체크인 시간까지(알베르게마다 다르지만 평균 1시-2시 정도에 체크인을 한다) 기다려야만 했다. 마라톤 하겠다고 온 길이 아닌데. 천천히 걷겠노라 다짐하고 온 길임에도 뭐가 급한지 옆도 보지 못하고 앞만 보고 걸었다. 또 반성. '나 회개하러 온건가...?' 

 그나마 한국에서 걱정하고 궁금해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영상통화를 위한 시간이 고작 쉬는 시간이자 천천히 걸으며 한 숨 돌리던 순간이었다. 습관이 무섭다. 빠르게만 살던 나에게 여유란 고작 통화하는 그 시간이라니. 점점 나의 페이스를 찾게 노라 작은 다짐 정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셋째 날,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예쁜 론세스바예스 알베르게로 알려져 있지만 내가 갔던 시기에는 부분 영업으로 인해 가장 안 좋은 구옥의 숙소(겨울철이라 신관 이용이 안 된다)에서 불편한 밤을 보냈다. 그럼에도 아직은 발걸음이 가벼웠고, 혼자 걷겠노라 아침 6시에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칡흙 같은 어둠을 뒤로한 채 씩씩하게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든 감각을 자극하며 무엇하나 바스락 거리기만 치더라도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고, 나의 심장 소리는 마치 바람 소리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숙소에서 막 나오는 길은 새카맣게 어두운 오솔길로 헤드랜턴이 없었더라면 1미터 앞도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로 깜깜했고, 높다란 나물들과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바람이 어우러져 마치 어딘가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와도 모를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내 후회가 밀려왔고 다음부터는 욕심부리지 말고 해가 뜨면 나오거나 다른 사람들과 해가 뜨기 전까지의 길을 같이 걷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한 시간이 흘러 또 혼자 걷겠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금세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 아니던가. 고즈넉한 시골 풍경과 향긋한 빵 냄새가 나는 시골 빵집을 지나 또 그렇게 열심히 앞만 보며 직진하고 말았다.


넷째 날, 빠른 걸음걸이가 당장 고쳐지는 것은 아니니, 해가 뜨고 가장 늦게 출발해 보기로 했다. 아침 8시경 걷기 시작한 오늘.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순례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고 있었다. 황량한 공업지대의 흙먼지 날리는 구간을 지나갈 때는 1km 남짓 떨어져 있는 순례자들의 꽁무니만 보여도 안심이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다. 누가 "빨리 걸어라! 혼자 걸어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엇보다, 안정을 담보할 순 없지만 한 순간도 사람이 무서웠거나 해코지 한 사람도 없었으면서 아직은 몸이 굳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또 열심히 앞만 보며 쉬지 않고 걸었다. 페이스는 애당초 없었다 나에겐.


다섯째 날, "느리게 가자! 느리게 가자!" 노래를 불러도 쉽사리 몸이 천천히 가지질 않았다. 이렇게 앞만 보며 달리기 하듯 걸으려고 온 것이 아닌데, 뭐 이런 데서 조급증이 생겨 버린 것인지. 방법은 딱 하나. 큰 도시나 마음에 드는 마을이 나오면 아예 연박(이틀 이상 머무르는 것)을 하고 유유자적 보내기로 결정했다. 5일 동안 걸으면서 나온 가장 큰 도시인 팜플로나(Pamplona)에서 알베르게가 아닌 호텔로 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책도 읽고 맥주도 마시고, 펍에도 가고 이틀간 편히 쉬다 또다시 걷기로 한 것이다. 사실 도시 여행은 한없이 느긋한 편이다. 많은 역사 유적지도 마다하고 펍에 가서 맥주 한 잔 마시고 공원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게 나의 최대의 낙이다. 이상한 버릇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이후에도 도시만 나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호텔로 가서 하루 쉬면서 도시를 즐기고 이틀 후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여섯째 날, 일곱째 날... 그리고 십 일째 되는 날 스쳐 지나갔던 동행들과도 조금씩 떨어지더니 이제는 정말 혼자 걷는 길이 되었다. 속도가 맞지 않았을뿐더러, 모두 각자의 목표와 의미를 갖고 떠난 길이니 서로 부담이나 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라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만큼 만남과 이별이 자연스러운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그만큼 만남과 이별이 가장 익숙해져야 할 곳이다. 더구나 겨울 까미노라서 드문드문 있는 순례자들이었기에 이곳에서부터는 정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순례자들과 어쩌다 마주치는 게 전부였다.




생장에서 시작한 까미노는 대략 십이일쯤 되었을 무렵 스페인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확진자가 늘어나며 EU 국가에서 심상치 않은 상황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800km에서 대략 300km를 걸었고, 점프(일부 구간을 건너뛰다) 해서 100km가 남은 사리아(순례자 길 인증 최소 거리)에서 마지막 5일을 걷기로 결심하고 사리아(Sarria)로 행했다. 그렇지만 이 역시도 나의 맘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힘찬 발걸음으로 하루를 걷고 포르토 마린(Portomarin)의 한 숙소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저녁이 다 되어서야 알베르게 주인이 나를 다급하게 찾았고, 내일부터 모든 숙소와 교통수단 등이 제재가 시작될 것이고 락다운(Rockdown-국경 봉쇄 포함 안)이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코로나로 더 이상 길 위에서 걷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동네 주민들과 알베르게 주인의 도움으로 영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를 수소문하여 일사천리로 택시 예약을 해 주었고, 내일 나의 마지막 도착지가 되었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로 향하기로 한다. 


아침이 밝았고, 숙소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이탈리아 친구들이 합석을 요청하며 이미 나와 가격을 정한 택시기사와 택시비를 흥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비싼 택시비에 부담이 되었던 터라 기분 좋게 1/3 가격으로 셰어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덕분에 몇 유로 깎기까지 했다. 그렇게 4-5일을 걸어야 할 그 길을 택시로 2시간 만에 콤포스텔라에 도착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워하던 그들과 서로의 안녕과 조심해서 귀국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연신 인사를 나눴다.

 

이미 그곳에는 프랑스길 루트에서 순례자 길을 걷고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모여 있었다. 5일 만에 넘어온 사람, 10일 만에, 30일 만에 그리고 하루를 남겨 놓고, 도착한 다양한 상황, 다양한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은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태양에 그을린 검은 피부색이었는지 초라한 옷과 먼지에 구른듯한 허름한 옷인지, 아니면 깨끗하게 정갈하게 꾸미고 그 자리에 나왔든 우리 모두는 코로나로 인한 전시 사항과도 같은 어려움을 헤처 나가야 하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처음이지만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서로의 푸념을 털어놓는가 하면, 옹기종기 모여 지금 정확한 문제가 무엇인지 대사관과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알아보았고, 터무니없이 높아진 항공권과 그마저도 캔슬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난 결국 모든 선택을 포기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락다운(lockdown :봉쇄)을 선포하기 전날 밤 밤새 버스를 타로 포르투로 넘어왔다. 최종 리스본으로 아웃을 해야기에, 뜻하지는 않았지만 순례길의 여독과 아쉬운 여행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유럽 중에서도 코로나로 인한 확진자가 없었고, 도시도 늘 지내왔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상황이었다. 다만 EU연합에서 결정한 락다운 시행을 선제적인 조치로 취하게 되었고, 그렇게 기다리던 귀국 일정 항공편도 모두 캔슬이 되었다. 포루투에서 리스본으로,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영국(브렉시트-Brexit- 인한 EU연합의 락다운 시행이 되지 않던 나라)으로, 영국에서 두바이를 거쳐 인천 공항에 안전하게 잘 도착하였다. 그 사이 가족들의 엄청난 지원과 걱정하는 친구들의 연락이며 방법까지 총동원을 해야 하는 민폐 여행객이 되어 버렸고, 세계여행을 하겠다며 자발적 퇴사까지 한 나는 졸지에 백수가 되어, 여행도다 마치지 못하고 중도 귀국한 여행자가 되었다.







글을 몇 번이나 지우고 썼는지 모르겠다. 가장 어려운 여행지가 돼 버렸고, 그렇게 유난히도 추운 겨울이 되었다. 실제로는.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한국에 돌아온 건 세상 만물이 푸릇푸릇하게 새 살이 돋아 날 것만 같은 따뜻한 봄이 었음에도, 나의 몸은 이상하리만큼 부들부들 떨렸고, 모든 일에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하루하루 먹는 것에 집중하고, 밤엔 깨어 있고, 낮엔 자는 일이 나에겐 전부였다.


이제야 산티아고 순례자 길의 의미를 되짚어 보았다. 엄청난 깨달음이나 나를 변화시킨 것은 전혀 없었다.



<<3.14.2020 일기 발췌>>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서 멍하니 2시간을 바라보았다.


매일매일 비와 싸우며 힘들게 걸었는데,

그렇게 마지막 날은 찬란하게 맑고 따뜻하게 나를 맞아 주었는지...

'이런 상황에 멋쩍은 웃음이 계속 나오더라. 너무 씁쓸한 감정과는 다르게 말이야!'


아쉬움에 엿 같은 이 시국을 원망을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고,

그럼에도 언제 그랬는지 금세 신이 난 아이들처럼 인증 사진을 찍었고,


" 지금은 자의든 타의든 돌아가겠지만!

다시 이 길을 웃으며 다시 걸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라고 뜨겁게 이야기했다.


아쉽게 끝났음에도 한 동안을 얼싸않고 뜨겁게 그들만의 인사를 하는 사람들.

중앙 한자리에 그대로 앉아 한 시간을 성당을 바라보던 그들,

그리고 나처럼 욕을 하던 사람들까지 모두의 안녕을 바라며!


온전한 길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매일매일이 급박한 상황으로 온갖 선택의 기로에 놓였던 이 특별했던 상황을.

한국에 돌아가면 이 또한 기억의 미화가 될 것임을 알기에 

좋은 마음으로 돌아가 다시 올 기회를 기대한다.


Bye Camino de Santiage, See you again!



단지 그 길은 잔잔했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다시 가야 할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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