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제가 문제인거야
문장의 흐름이 짧다.
휴대폰에서 시간 떼우기로 제격인
인스타 화면에 맞춰져 버린 글쓰기 수준이다.
화려하고 힘있는 필력따윈 없고
일기장 수준의 글쓰기에
사람들은 댓글을 달아 준다.
내 글이 그리 밝지 않아서일까
댓글을 달아 주시는 분들의 글들은 무게감이 있다.
신중에 신중을 더하고
마음 여린 어린 영혼이 혹여나 마음에 또다시 상처를 입지 않을까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댓글이 조심스레 달린다.
그 댓글을 하나하나 받을 때 마다
며칠을,
길게는 몇 주간 곱씹는다.
하염없는 응원의 댓글을 받을때면
한평생 받지 못한
어미가 자식에게 해 주는 응원 같아 마음이 뜨거워져
울컥 눈물이 나기도 했고
나의 존재에 대해
깊은 응원을 북돋아 주시는 댓글이면
오래도록
'나는 왜 나의 존재를 수치스러워 하는 가'
닥치는 대로 심리 책을 사다 읽으며
답을 찾곤 했다.
"나는 왜 나를 함부로 대할까, -문요한-" 책을 읽으며
여러 댓글들의 해답을 찾았다.
지우려 했으나
발길질이 너무 심해 낳아버렸다는 생모의 이야기부터
내가 태어난 시간이 아침 즈음인지 오후인지 저녁인지도 아무도 모르는
탄생조차도 축복받지 못한 나의 존재는
얼마전까지도 '수치심'으로 인식되었다.
불안한 생모와
그를 붙잡고 매달리는 아빠 사이에서
어린 나는 그 둘의 사이를 화해시키려
짖궂은 장난을 하며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결국 떠나 버린 생모를 대신해
내 곁에 있어 준건
알콜중독 할아버지와 할머니.
해질녘이면 동네 어귀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술에 취해 들어온 할아버지의 발소리를 들으며
어린 나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할아버지 비위를 맞추려
무던히도 애 썼다.
그 후
새엄마와 살면서
무심해 진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해 댔다.
아빠와 유일하게 대화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아빠, 학교에 선생님이 있죠~,"
"아빠, 언니는 왜 저럴까요?"
"아빠, 할아버지는 말이에요.."
결혼 후에도
나의 존재는 수치심, 태어나지 말아야 했던 존재로
주변 가족들의 눈치와 분위기를 살피느라 항상 분주했다.
이상적인 삶을 꿈꾸었다.
이상적인 존재를 꿈꾸며
나 자신을 채찍질 했던 날들이었다.
그러다 댓글이 달렸다.
'멋진 교육자이자 강사인데 왜 자신을 하염없이 낮게 바라보냐...'라는
그러게, 참 이상하다.
나는 지금 어느정도 이룬 것이 있는 사람인데
항상 내 마음속에는 내가 하찮다.
가족을 위해 근사한 식사를 만들어 주지만
나를 위해서는
편의점엘 가 간식 하나 사는 것 조차
아까워 벌벌 떨다니.
책에서 이야기 한다.
"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가 문제다."
카페에서
남편은 소설을, 큰 딸아이는 영어 문제를,
아들은 만화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존재가 문제가 아니래,
나의 문제가 문제인 거야.
나도 귀한데.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데, 그걸 여태 몰랐어.
비록 태어나 자란 환경이 온전치는 못하였지만
태어나 온전한 환경에서
건강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온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벗이 되기로 했다.
주변의 한마디에 벌벌 떨며
그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나의 아름다운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고
나는
나의 눈을 들어
나의 안을 바라보기로 했다.
어느 산부인과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작고 연약한 아기가
내 마음속에 산다.
너는 참으로 귀하단다, 아가야.
이제 내가 보듬어줄게.
이제 내가
너의 어미도 되고,
너의 아비도 되고
너의 오랜 벗이 되어줄게.
*나의 글에
진심으로 공감해 주시고
댓글을 달아 주셨던 모든 분들께
이곳에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내 남은 삶의 방향을 잡아 주시고
상처를 보듬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