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햇살바람 Jun 18. 2022

용사가 된 날






2022.6.5. 호야 906일.


아기를 키우면서 이렇게 자잘하게 신경 쓸 게 많은 줄 몰랐다. 끼니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매일 씻기고, 일주일에 한 번 손톱 발톱 깎아주고, 두 달에 한 번 머리를 자르는 일 등등. 어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줘야 하는지. 나는 내가 그동안 저절로 큰 줄 알았는데 그게 큰 착각이었다는 걸 부모가 되고서 알았다.


바쁘고 정신없다는 이유로 아기 챙기는 일들을 깜빡할 때가 많다. 일요일에 깎던 손톱을 다음날 뒤늦게 깎은 적도 많고 주말에 빨아서 어린이집에 갖다 줘야 하는 아기 낮잠 이불을 그대로 다시 갖다 준 적도 있다. 머리카락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매번 눈을 찌를 것 같이 조마조마해질 때쯤 자르러 간다.


그날도 호야 앞머리가 눈을 찌르기 직전이었다. 이번 주말에 자르지 않으면 다음 주말에는 눈을 찌를 게 분명했다. 오전에 부랴부랴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다.


"혹시 오늘 예약되나요?"

"죄송한데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예약이 꽉 차서요."


이런. 다른 미용실에 연락해볼까 하다가 관뒀다. 항상 아기 머리를 자르던 단골 미용실이 안된다면 다른 미용실에 가서 위험(?)을 감수하느니 내가 직접 자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여러 번 잘라본 경험도 있었다. 예쁘게 자르지 못할 뿐....


뽀로로를 틀어놓고 호야가 넋을 놓고 보는 사이 아기 손톱 가위(매번 아기 손톱 가위로 머리를 잘랐더니 그게 습관이 됐다)로 이발 시작! 아기 얼굴에 머리카락이 안 묻도록 A4용지를 앞머리 밑에 받치는 등 부산스럽게 머리를 잘랐다. 급한 앞머리만 자르려고 했는데 자르다 보니 옆머리, 뒷머리까지 손이 가서 앞으로 두 달 간은 미용실을 안 가도 될 것 같았다.


"어때? 나 미용사 같지 않아? 미용실도 안 가고 돈 굳었지?"

짐짓 의기양양해진 나는 바닥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청소기로 치우는 남편에게 말했다.

'빨리 인정해줘. 빨리 인정해달라고.'

내 마음을 모르는 남편은 그 특유의 심드렁한 얼굴로 언어유희 한 마디를 날렸다.

"미용사가 아니라 그냥 용사 같은데?"




머리 자르기 전과 후


매거진의 이전글 기저귀 입히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