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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온 Nov 08. 2024

맞짱뜰 결심

화려한 복직을 목전에 두고 괴한을 만나다



드디어 내일이다.


2년이라는 육아 휴직을 그냥 보낼 수 없어 준비하 게 된 자격증 시험. 대학생들은 6개월 정도 공부하면 1,2차 시험을 한 번에 합격하기도 한다던데. 돌쟁이 이유식 끓여가며 준비해야 했던 나는 일 년에 걸쳐 1차, 2차 시험을 따로 치르기로 계획했다. 1차 합격, 그리고 다시 육아와 공부. 내일 있을 2차까지 거뜬히 치러내고 합격증 휘날리며 복직하리라.


시험 전날이니 만큼 남편과 아이는 친정행. 홀로 집에 남아 삼 수험생의 기세로 복습을 마치고 컨션 조절을 위해 몸을 뉘인다. 시험에 대한 긴장 탓 인지, 아이 없는 혼자만의 이부자리가 적적해서인지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알 수 없는 떨림과 기대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려던 그 순간.


툭.


신발장 쪽에서 소리가 난다. 너무나 분명한 인기척 이다. 새벽 1시가 훌쩍 넘은 시간, 수험생 응원한답시고 남편이 연락도 없이 찾아왔을 가능성은 0.1% 도 되지 않는다. 정확한 입력값에 의해서만 출력되는 그는 서프라이즈 따위는 키우지 않을뿐더러 시간상, 거리상으로도 불가능한 이야기. 순간 누워 있던 온몸이 굳어지고 CSI 명장면들과 함께 오만가지 생각이 주마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어떻 게 일 년을 준비했는데. 변을 당할 것이면 1차 시험 전에 당하던가. 내일 마지막 시험만 보면 끝인데. 내가 잘못 되면 단호박 이유식은 누가 끓인단 말인가.


인기척을 낸 신발장 그 사람도 조용하다. 의도치 않게 물건을 떨어뜨려 소리가 나버린 상황에서 본인도 당황했겠지. 딱히 거실이라 부를 만한 공간도 없는 구축 손바닥만 한 신혼집이다. 그가 멈칫해 있는 신발장과 내가 누워 있는 안방을 구분짓는 경계는 빈약한 미닫이문 하나. 클래식한 미닫이 문 너머에서 내뱉는 그의 뜨거운 날숨이 내 귓볼에 닿은 듯 소름 끼친다.

112.


뻣뻣이 굳어 있는 손을 간신히 내밀어 번호를 눌렀만 첫 번째 발신음이 울리기도 전에 마음을 바 통화를 종료시킨다. 나까지 인기척을 내면 당황한 상대를 더 자극할 수 도 있을 터. 보통 아파트의 여 문이면 일단 문고리라도 잠가볼 텐데 잠금장치 없는 미닫이문이라니. 퇴로가 없다. 상대방도  안에 있는 나의 존재를 아직 모르는 상황 같으 내가 먼저 선제공격을 하자. 미닫이문을 확 열어 젖힌 후 그를 밀치고, 무조건 현관 밖으로 탈출하는 거다. 쥐 죽은 듯 몸을 일으켜 아이 문화 센터 트니 트니 교실에서 교구로 나눠준 무지개 사다를 장 총 마냥 옆구리에 낀다. (당시 안방의 물건 중 그것 가장 크고 위협적인 물건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미닫이 문을 부슬듯 밀어젖힌다.

나도 모르게 감았던 실눈을 떠보니 밀쳐 버려할 상대는 일단 보이지 않는 상황. 장총을 겨누 장을 정찰하는 군인처럼 무지개 사다리로 온 집안의 문짝을 하나씩 젖혀본다. 싱크대 문짝지 다 열보고 나서야 조금씩 맑아지는 정신. 이성을 되찾고 찾아간 소리의 진원지에는 차키 지갑과 장바구니들이 바닥에 널브러져있다. 신발장 문에 붙여 두었던 뽁뽁이 가방 걸이가 에코백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어졌던 것.


불안정 : 작은 외력에도 역학적 평형이 깨어지는 상태.


휴일을 맞아 떠난 여행길.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여느때와는 조금 다른 기계음을 내며 요란하게 휘청이기를 반복하고 있는 지금, 호랑이는 담배 피고 1호는 이유식 먹던 시절에 있었던 신발장 습격사건을 떠올리며 불안의 진을 토닥여본다.



덧붙임.

그날 밤. 다시 잠을 청하려 누웠는데, 혼자 생쑈를 하는 동안 와 있던 문자 메시지 한통.  
< 신고 전화하셨나요? 말씀하시기 어려우면 문자로 말씀하세요. - 112 >  
분명히 발신되기 전에 취소버튼을 눌렀는데. 독보적인 대한민국 통신망과 치안 수준을 칭찬 하지 않을 수 없다.



트니트니 무지개 사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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