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가는 나의 다크서클
2018년 4월 21일 ~ 4월 23일
바르셀로나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그라나다로 이동했다. 전형적인 회사원이던 시절, 여름휴가로 짧고 굵은 여행을 해왔던 나는 스페인 여행도 습관처럼 동선, 일정, 동행들까지 모두 철저히 계획을 해놓은 상태였다. 바르셀로나를 함께 여행했던 두 동생, 그리고 그라나다에서 합류한 막내와 나, 이렇게 총 넷이서 그라나다와 스페인 남부를 함께 여행하기로 하고 미리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로 모였다.
나를 제외한 동생들은 모두 20대 초중반의 어린 대학생들이었다. 앞자리 숫자부터가 다른 이 어린 친구들과 동행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마냥 설렜다. "난 죽을 때까지 철들지 않을 거야"를 내뱉곤 했었던 내가 다시 이십대 청춘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동생과 4살의 터울이 있었던 나는 소위 '장녀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가이드라도 된 듯 이 동생들의 여행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몰려왔고 계획이 하나라도 틀어질 때면 모두 내 탓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나(언니),오늘은 뭐해요?"라며 내게 물었고 잠자리에 들 때면 굿나잇 인사와 함께 "근데 내일은 뭐해요?"라며 내게 물었다. 물론 동생들은 별다른 의미 없이 가장 나이가 많은 연장자인 나에 대한 예의로 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가 아니라 "오늘 점심은 A를 먹을래, B를 먹을래, 아니면 C를 먹을래?"라는 구체적인 선택지를 줘야만 할 것 같은 '계획 강박증'까지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내 스페인 여행의 전부를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녀석들과의 시간이 행복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골목대장과 아이들"이라도 된 듯 그라나다의 온 골목을 훑고 다녔고, 지칠 때면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카페에 들어가 시원한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 또 허기가 질 때면 눈에 보이는 허름한 타파스 바에 들어가 맥주와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진부한 인생을 논하기보다는 요즘 유행하는 패션이나 각자의 쇼핑 리스트를 공유하며 서로 금세 친해졌다.
우리는 상점들이 문을 닫고 타파스 바의 셔터가 내려갈 때까지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와인을 마셨다. 평소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듣는 것'을 더 좋아했던 나는 동생들이 서로 티격태격 대며 재잘거리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보다 사실은 은연중 느껴지는 세대차이 때문에 대화에 쉽게 끼지 못했고, 자연스레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동생들이 불편할까 잠자리에 먼저 들지도 못하게 되면서 나의 다크서클은 짙어져만 갔다. "나도 저 나이때는 삼일밤을 새도 끄떡없었는데..."
지금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드라마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이 곳. 889년에 지어진 이 작은 요새는 13세기 중반 재건되어 당시 그라나다 왕국의 왕궁으로 쓰였던 곳이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라나다 왕국은 무너졌지만 이 궁전은 이슬람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장식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세계문화유산들은 대게가 이런 슬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많은 유산들이 일제강점기 때 불에 타거나 약탈된 사실이 떠올라 새삼 화가 나기도 했다.
장녀 증후군이니 계획 강박증이니 하며 글을 적었지만 사실 여행 당시엔 이렇게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어쩌면 좋은 곳만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처럼 동생들을 이끌고 다니며 보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연락하는 한 동생이랑 가끔 여행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 우리들 때문에 누나 많이 힘드셨잖아요 ㅎㅎㅎ"라고 말하는 걸 보면 조금은 겉돌았던 나의 삼십춘기가 동생들에게도 느껴지긴 했나 보다. 꼰대같이 보이진 않았을지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나의 본격적인 여행은 순조롭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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