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하나?
내 인생의 첫 번째 기회는 지독히도 추웠던 고3 수능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쓰기 좀 민망하지만,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 날 전교생 앞에서 '수학 우수자'로 상을 받았을 정도로 수학을 참 잘했었다. 글 앞머리부터 이런 재수 없는 문장을 쓰는 이유는 수능에서 다른 과목도 아닌 수리영역을 망쳤, 아니 망친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조져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당해년도 문제들이 내 약점만을 공약한 것이지 주관식 첫 번째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이미 주어진 시간은 몇 분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렇게 몇십 점을 풀어 보지도 못한 채 날렸다. 외국어(영어) 영역을 치르기 전 주어지는 점심시간에 엄마가 정성스레 싸주신 도시락을 입에도 대지 못하고 1시간 내내 서럽게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은 그런 내가 참 꼴 보기 싫었을 텐데 남은 시험을 떠올리며 다시 정신을 부여잡을 수 있도록 잘 다독여주었다. (그 친구들과는 1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연락하며 잘 지낸다.)
수능이 끝나는 시간에 엄마가 학교 앞에 마중을 나와 계셨던 것도 같고... 그 날의 기억은 학교를 나선 이후로는 남아있지 않다. 우리 엄마의 기억을 빌리자면 그 날 저녁, 내 방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학원을 안 보내줘서 그렇다느니, 과외를 안 시켜줘서 그렇다느니 부모 마음을 찢어놓는 소리만 해 대면서. 역시 상처를 받은 사람은 기억해도 준 사람은 기억 못 한다더니, 남 탓하기 좋아하는 건 그때도 여전했네 싶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희망 학과에 적곤 했던 '수학교육과'를 가기에 내 점수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재수를 하며 1년을 더 공부할 자신도 없었고 그럴 가정형편도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엄마의 꿈이자 내 목표였던 '선생님'을 포기하고 지방 국립대 '기계공학부'에 07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망친 수능 덕분에 당시 유행했던 '공대 아름이' 비스무리한 대접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적성에도 딱 맞았던지라 꽤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대기업 입사 통지서를 받으면서 내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10년도 더 지난 수능시험 하나가 내 인생의 첫 번째 기회였다고 말하는 게 지금은 우습게 들리지만, 돌려 말하면 그 이후로는 그저 그런 시시한 일상이었다는 거다.
이 스토리는 내가 취준생 시절, 자기소개서 항목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생의 가장 큰 고난(역경)과 그것을 이겨낸 방법" 항목에서 자주 써먹었던 스토리다. 솔직히 말해 그때 수능을 망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학부모들과 씨름하는 것에 더 스트레스받아하며 때려치네마네하는 교사가 되어 있거나, 내가 그 당시에 바랐었던 스타 강사가 되겠다며 치열한 인강업계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몸이 병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직업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난 그럴만한 그릇이 못된다. 다시금 생각해봐도 그날의 망친 수능이 지금의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기회였던 건 틀림이 없다.
그럼 이제 코로나로 인해 나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나는 작년 초 약 300일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지만, 3개월 만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자동차를 타고 미국부터 아르헨티나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종단하겠다며 캐나다로 날라가 5개월간 포도농장에서 미친 듯이 일했다. 지금도 가끔 손가락을 시리게 만드는 그 개고생의 보람으로 천만 원을 모았고 작년 말부터 여행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은 미국과 멕시코 여행을 마치고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멕시코 칸쿤에 체류 중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래위로 국경이 닫혀서 강제로 체류 중이다.
전 세계를 뒤집어 놓은 그놈의 코로나가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3개월째 버텨보는 중이지만,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그럼 도대체 코로나가 무슨 기회를 줬다는 거야?
3개월을 이 곳에서 이른바 '존버'를 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중 첫 번째는 유튜브 채널 운영이다. 평소 꿈에도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남자친구의 추진력으로 채널을 개설하고 캐나다에서 장만한 액션캠에 담은 여행 영상들과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편집해서 하나 둘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구독자수는 아직 미미하지만 벌써 3개월 차, 우리 채널에는 벌써 31개의 영상들이 쌓였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계획했던 남미 여행 영상은 만들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때문에 다양한 컨셉의 영상들을 찍어보며 우리만의 스타일을 잡아가는 중이고, 편집 실력 또한 나날이 키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미뤄왔던 블로그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2년을 넘게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과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꼼꼼히 포스팅을 써 나가고 있다. 이도 마찬가지로 해외여행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줄어든 탓에 조회수는 생각보다 나오지 않지만 블로그 최적화인지 뭔지에 성공한 것인지 대부분 포스팅이 검색 1페이지에 등장하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욕심도 생기고 좀 더 전문적인 글이 써보고 싶어져서 얼마 전 두피디아 여행작가로도 지원을 했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지막으로는 바로 이 '브런치'다. 나는 어릴 적 원고지라면 질색을 할 정도로 글쓰기를 싫어했었다.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는 독후감, 수필 정도나 억지로 쓰는 정도였다. 여행을 오래 하면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은 "그 정도 여행했으면 이제 책 내야지"를 인사마냥 던지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내가 무슨 책이야, 책은 아무나 내나, 난 뼛속까지 이과생이야"라며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해 왔었다.
그런 내가 그저 시기가 맞아떨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갑자기, 나도 왜인지 모르게 '글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코로나 때문에 집콕 중이던 차에 곧바로 실행에 옮겼고 결국 지금 브런치에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독립출판이든 1인 출판이든 내 이름이 박힌 책 한 권을 남기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만약 여행을 계속했더라면 매일매일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자기 바빴을 테고, 와이파이도 잘 되지 않는 환경에서 나는 평소와 같이 일기 한 장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놈이 이런 무시무시한 전염병으로 퍼지지 않았고 내가 계속 여행을 했었다면 시도조차,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도 '앞으로 뭐해먹고 살지?'만 반복하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 어느 작은 회사에 취직해서 '결혼은 언제 하나' 넋두리하며 반복되는 일상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그 어느 것도 성공을 거두진 않았기에 '기회'라고 말하는 건 과도한 긍정 회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의 십중팔구는 그것을 찾지 못해 방황을 하고 있었고 나 또한 그랬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책이나 유튜브 영상들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것' 혹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세요'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이놈의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지금 나의 24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을 수 있는 것도 쉽게 오지 않을 기회임은 분명하다.
"자, 그럼 다음 고민을 시작하지!"
"그렇다면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P.S. 지금도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고 계시는 많은 분들께 제 글이 오해가 없길 바라며 잘 헤쳐나가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시는 의료진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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