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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카라얀 대 번스타인

by 스텔라언니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도 카라얀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죠. 그 정도로 카라얀은 지난 반세기 클래식의 대표적 스타였습니다.

카라얀

10년 후에 미국에서 태어난 번스타인은 최초의 미국 토박이 유명 지휘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는 미국의 음악가들이 중절모를 쓰고 유럽인 행세를 할 때,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녔지요. 그의 매력에 미국인들은 열광했습니다.

번스타인

카라얀은 1908년 오스트리아 짤츠부르크에서 태어났어요. 모차르트와 동향인입니다. 그는 음악원을 졸업한 후 빈 공대에도 다녔습니다. 그래서인지 레코딩 기술에 큰 관심을 보였고 엄청난 양의 음반을 남겼지요. 그는 타고난 사업 감각으로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지휘자가 되었으나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한 카라얀은 취직을 하려면 나치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933년 결국 나치당에 입당합니다. 그제서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후에 말하기를

“그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더한 짓도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전후에 그는 친나치 경력 때문에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녹음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음반 때문에 유명해진 음악가였습니다.

유명세에 힘입어 1954년 베를린필의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푸르트벵글러 타계 후 후임자가 된 것입니다. 이후 자그만치 35년간 베를린 필을 이끌었어요.

그는 1년에 20개가 넘는 음반을 제작하고 수익금을 베를린필 단원들에게 지급했습니다. 독재자였으나 마케팅의 귀재로 단원들에게 높은 임금을 줄 수 있었지요. 그는 단원들에게 환호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의 음반은 900여종에 이르며 현재에도 사람들은 그의 음반을 구매합니다.

그 중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을 들어볼게요.

https://youtu.be/PXqZF288zYE?si=YfDfvELr_i-GVwvS

1918년생인 번스타인은 미국에서 태어나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과 언어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유명한 작곡가 코플랜드를 만나 작곡과 지휘에 전념하게 됩니다.

1943년 뉴욕 필의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가 병이 나서 갑자기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부지휘자였던 무명의 번스타인이 리허설도 못 하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연주를 너무 잘해 그는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됩니다.

그는 유럽에 대해 늘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던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어요. 드디어 미국 토박이 출신으로 명 지휘자가 배출되었으니까요. 미국인들은 그를 매우 좋아했지요.

그는 ‘잘 생기고 통속적이며 좌파에 동성연애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사실이었죠. 뉴욕필의 상임지휘자가 된 후, 공원에서 무료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카라얀이 음반에서 가능성을 보았듯이 번스타인은 티비에서 가능성을 보았어요.

1955년 TV시리즈 <청소년 음악회>를 제작해 대중적인 스타가 되었죠. 디비디로 구매 가능하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클래식에 대해 쉽고 재미있는 해설을 해주는 음악회입니다.

그는 클래식 뿐만 아니라 뮤지컬, 영화음악에도 손댔고 책도 썼습니다. 그야말로 르네상스맨이었죠. 지휘에만 집중한 카라얀과는 다른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지휘할 때 포르테 부분에서는 공중으로 껑충 뛰어오르는 제스처를 선보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죠.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그의 지휘로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를 들어볼게요. 재즈를 기반으로 한 오케스트라 작품입니다.

https://youtu.be/IGpMLoFyjwA?si=7D7kiU2q7PUOxV-3

오늘부터 일상 시작이네요! 모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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