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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의 서사

by 햇살샘

수업의 내러티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의 서술자가 된다.” - 폴 리쾨르

유튜브 영상으로 1년에 2억을 벌었다는 창작자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한 유튜브를 운영하고 있었고, 콘텐츠는 삶의 교훈이나 이야기를 담은 내용으로, 인공지능 도구로 제작되고 있었다. 흥미로웠던 점은 그가 ‘이야기’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다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여야 해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핵심 단어와 흐름이 있어요. 시기별로 선호하는 주제도 있고요. … 영상을 시작할 때에도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와 같이 관심을 끌어당기는 말로 시작해요” 이야기의 주제, 흐름, 연계성, 표현방법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창작자의 태도에서, 문득 깨닫는 바가 있었다.


‘수업도 그렇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의 이야기에 도입, 전개, 결말이 있다고 말한다. 수업도 그러하다. 교사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동기유발부터 시작해서, 수업의 ‘기승전결’을 고민한다. 어떻게 수업을 시작해서 학생들의 흥미를 얻을지, 어떤 활동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떠한 흐름 속에서 배움이 완성될지를 끝없이 탐색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은 수업에서 학생들이 의미를 만들어가는 경험의 기반이 된다.


보통 수업안을 짤 때에는, 몇 가지 형식이 정해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교사들이 주로 활용하는 단계로 ‘도입-전개-정리’가 있다. 좀 더 전문적으로 수업을 계획할 경우에는, 교과별 특유의 수업모형을 따르기도 한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시절, 교과별로 여러 수업모형 단계를 줄줄줄 외웠던 기억이 난다. 현장에 와서는, 학창 시절 외웠던 수업모형을 실제 수업에 녹여내는 것이 주어진 과제였다. 교과연구회 활동을 하면서는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수업 모형을 익히고, 연구회 내에서 수업모형을 직접 만들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수업이 특정 단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수업의 흐름과 내러티브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함을 깨닫는다. 비단, 수업뿐만이 아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콘텐츠, 예를 들어 글, 영상이나, 강의자료 등에도 나만의 내러티브가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함을 느낀다. 내 색깔이 조금씩 콘텐츠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특정 글을 읽으면 누가 썼을지 대략 짐작이 되기도 하듯, 콘텐츠에는 그 사람의 숨결이 담겨있다. 수업 또한 그러하다. 수업안에는 수업자의 신념, 철학, 그동안의 경험, 창조성이 담겨있다. 그러한 수업안이 구체적 배움으로 실현되는 것이 바로 수업이다. 예전에 찍었던 수업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절 나의 치열한 고민, 애씀이 전해진다. 학생들과 호흡하는 가운데 창조되는 배움의 찬란한 순간에 전율을 느끼기도 한다. 수업에서 나를 본다. 교실 속 숨겨진 이야기와 나의 삶의 이야기가 서로를 비추며 흘러간다. 수업은 결국,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나의 내러티브가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수업에서, 삶에서 의미를 만들어간다. 나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가 학생들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최고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영혼을 감동시키며, 자신들의 문제와 상황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Peter Reason, 1981:50)



각자 고유한 수업의 내러티브


내게 있어, 수업의 내러티브에 큰 영향을 준 것은 ‘글쓰기’이다.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승전결을 떠올리게 된다.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는 것이 독자의 흥미를 끌지, 어떤 내용을 담을지, 어떻게 그 내용들을 논리적으로 이어갈지,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를 끝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내 생각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언어를 사막에선 바늘을 찾듯이 탐색하곤 한다. 물론, 여전히 글쓰기는 어렵고, 생각의 흐름에 따라 두서없이 글을 쓸 때도 많지만 말이다.


이런 경험은 자연스럽게 수업 디자인에도 스며든다. 글에서 처음과 끝이 오묘하게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희열 때문에, 수업안을 짤 때에도 시작과 마무리가 균형 있게 연결되도록 신경을 쓰곤 한다. 수업을 구성하는 과정이 마치 한 편의 글을 쓰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야기가 흐름을 가지듯, 수업도 나름의 서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나의 관심사 또한 수업의 서사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예술을 좋아하다 보니, 수업에서도 예술작품을 종종 활용한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악적인 요소를 다른 교과 수업에 활용하기도 한다. 나의 관심사가 수업에 스며드는 것이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선생님은 영화의 한 장면을 배움을 위해 활용하고, 경제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은 경제 개념을 게임 요소로 녹여 수업을 설계하기도 한다. 같은 교과서 내용을 다루더라도, 교사에 따라 수업의 흐름과 색채가 다르다. 또한, 교사의 내러티브에 따라, 같은 활동도 서로 다른 빛과 의미를 창조해 낸다. 각자 고유한 수업의 서사가 있기에, 우리는 수업자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수업은 결국 관계의 이야기이다


수업을 계획할 때에, 수업안대로 수업이 착착착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다. 수업을 과학적, 체계적으로 설계하고자 고군분투하지만, 실제로 수업을 실행하는 과정은 과학적이지 않다. 수업안을 그대로 따라가기엔, 수많은 변인들이 존재한다. 학생의 한 응답으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수업이 흘러가기도 한다. 수업 중 돌발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이 수업을 방해할 수도 있으나, 예상치 못한 배움을 창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수업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고, 수업은 예술인 것이다.


실습학교에서 근무할 당시, 수업자 의도, 이론적 배경, 단원 분석, 실태조사, 평가계획, 수업안까지 두툼하게 갑안 지도안을 작성했다. 교사의 발문과 예상되는 학생의 응답으로 구성된 지도안을 꼼꼼히 작성했던 기억이 난다. 영화의 시나리오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교사는 시나리오를 알지만, 학생들은 그 시나리오를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는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만, 수업은 그렇지 않다. 그러하기에, 수업은 나의 내러티브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러티브로 함께 역동하며 흘러간다.


그럼에도 수업을 계획하는 것은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자 함이요, ‘배움’이라는 여정을 가기 위한 여러 경로를 탐색하기 위함이다. 여러 가능성을 고민하며,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고자 함이다.


좋은 수업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수업은 과학처럼 정밀하게 설계되지만, 실행은 예술처럼 즉흥적이다. 교사는 그 복잡한 순간들을 읽어내며,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것이 바로 교사의 전문성이며,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적 순간이다. 계획과 즉흥, 구조와 유연함이 공존할 때, 수업은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난 이제 안다. 수업은 교사의 내러티브만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학생들의 표정, 목소리, 질문, 침묵, 그 모든 것이 수업의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간다. 수업은 나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서사이다. 교사는 결국 서술자이면서, 동시에 청자이며, 공동 저자다. 그리고 그 관계의 이야기 속에서 배움은 잔잔히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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