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흔한 동네 풍경을 자세히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에는 노래방, PC방, 찜질방과 같이 '방'이 많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것을 바꾸거나 새로운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아주 피곤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임우진 님'은 새로운 시각으로 도시를 바라본다.
임우진 님은 프랑스에서 국립 건축가로 20년 넘게 활동하신 분이다.
오랜 외국 생활 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익숙했던 고향의 건축 방식과 문화에서 많은 재발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새로운 시각에서의 발견을 기록한 것이다.
1부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공간에 대한 고찰이었다.
혹시 신호등의 위치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운전자라면 알겠지만, 한국의 신호등은 대부분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다.
그렇기에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가도 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하지만 유렵은 다르다.
신호등이 정지선 쪽에 위치해 있고, 정지선을 넘어서면 신호를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운전자들은 정지선을 '지킬 수밖에 없다.'
이들이 이런 시스템을 만든 이유는 다민족, 다문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로를 믿을 수 없었고, 평화를 위해 강제성을 띄는 규칙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반면 단일 민족, 단일 문화인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관대했다.
그 결과 질서 속 무질서를 마주하게 되었고, 수많은 과속단속 카메라가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한다.
서구 도시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양심이나 시민 의식 같은 형이상학적 정신문화에는 일말의 기대도 없이, 어차피 대중이란 질서 따위 지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해 온 것이다.
- p. 26
재밌지 않은가?
한국과 유럽은 이런 인식과 문화의 차이에서 많은 부분이 달랐다.
2부는 도시에 대한 고찰이 담겨있다.
유렵을 가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럽은 기본적으로 계획도시의 형태를 띤다.
길이 있고, 길을 중심으로 건물이 들어선다.
도로의 시스템을 발전시켜 통행과 도시 서비스를 최적화해왔다.
반면 우리나라는 몇 개의 집이 모여 군집을 이루고, 그 군집들 사이에 남은 공간이 어쩔 수 없이 길이 된다.
그 길은 각 영역 간의 완충 공간이자, 만남의 광장이 되었다.
시골 장터도 열리고, 마을 잔치, 동네 씨름 같은 대회도 열렸었다.
우리에게 길은 단순 연결의 의미가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길은 집과 집, 동네와 동네를 이어주는 연결로에 가까웠다. 한국인이 잘 정비된 가로를 따라 건물이 들어서는 걸 처음 본 것은 수탈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는 20세기 초 일제 강점기의 '신작로'였다.
- p.138
더 나아가 내부로 들어가 보자.
서양에는 없는 '방'이라는 개념이 주는 사실도 아주 신선하다.
'노래방, 찜질방, PC방'과 '독서실, 당구장, 볼링장'의 차이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먼저 독서실과 당구장, 볼링장은 여러 사람이 사용하는 공공장소의 느낌이다.
반면 노래방, 찜질방, PC방은 최소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는 사적인 공간이다.
그렇기에 방은 '남'과 '우리'를 구분 지어 주고,
공동체 의식을 키울 수 있게 해주는 독특한 우리만의 문화이다.
한국인이 혈연 중심 문화에서 내면화해 온 '소속에 대한 집착'은 어려운 시절, 서로에게 심리적 버팀목이 되어 왔고,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더 큰 '품앗이'적 시너지로 개인과 집단이 서로 도움을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 명맥을 이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p. 230
맛있는 음식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술이 흥건해지면 마치 연어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듯 한국인들은 마음의 고향인 '방'으로 찾아들어 간다.
- p.199
「보이지 않는 도시」를 읽고, 책을 덮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방과 동네가 다른 시각으로 보일 것이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나의 눈에 건축사의 시선이 씌워진다.
평범하던 출근길과 퇴근길에 보이던 창 밖 풍경이 이제는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유럽과 한국의 문화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치 유럽 여행을 신나게 다녀온 기분이 든다.
환상적이다.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로의 여행. 목적지는 먼 미지의 도시가 아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믿는 바로 그 도시 속으로의 여행이다. 이 여행이 끝날 때즈음 당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다른 세계에 들어서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 p. 10 여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