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한글
한 시간 가량 잠을 잔 것 같다.
그렇게 적게 잤는데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은 이 기분.
등골이 오싹하다.
이 기분은 내일 이 시각 나는 기절해 있을 것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폭풍전야를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던가.
어릴 때부터 밤을 새운 그 날은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는 표현이 좀 더 적합했던 것 같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 날이다. 정신이 몽롱하다 싶을 만큼 피곤한 하루. 내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말이오, 내가 들이마시는 것은 이산화탄소인지 산소인지 구분도 잘 안 가는 그 경계에서 난 하루를 보낸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피로는 정도가 서서히 옅어질 뿐, 최소 일주일은 유지된다는 것.
이런 두려움에 위로가 될 수도 있는 나의 처지 하나는 난 대학생 4학년이라는 것이다. 4학년이면 학점도 널널하게 듣겠다 누군가는 나에게 '그럼 하루 푹 자,' 라는 말을 건네주겠지.
젠장.
어림없는 소리.
지난 3년을 아주 휘황찬란하게 보낸 나는 4학년 1학기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21학점을 듣고 있다. 그 와중에 뒤늦게 전공에 흥미를 갖게 되어 전공이 무려 하나, 둘, ... , 다섯 개다. (그럼에도 전공을 살려 취직하겠다는 생각은 개미 눈곱만큼도 들지 않는 것은 전공이 나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걸까.) 게다가 온라인 강의 덕택에 대부분의 중간고사는 레포트로 대체가 되었는데, 과의 특성상 사실 레포트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게 대부분이라 교수님들께서는 2주에 한 번꼴로 숙제를 내 주신다. 네, 다섯 분의 교수님이 그러시면 저는 매주 한 개의 과제가 있습니다. 매주 한 개니까 다행이라구요? 8주 동안 과제만 해봅시다.
얼마 전 하기시러병을 아주 지독하게 앓아 주말을 왼 통 잠으로 보냈더니 웬걸, 일요일 늦은 밤 내 눈 앞에 쌓여 있는 것은 수많은 선택사항들 뿐이었다.
포기할 것인가, 밤을 새워서라도 할 것인가.
지난날의 나라면 주저 없이 포기했겠지만, 이미 몇 장의 이력서를 통해 학점 0.0001점도 얼마나 아쉬운 지를 절절히 아는 나는야 4학년이기에,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를 위로하며 후자를 택했다.
제길, 이번 학기에 목표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학교만 열심히 다닐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못 지킬 판이다.
그저 학교 다니는 게 UFC급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