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코의 철학이라는 유튜브 채널이 있다.
운동할때 한번씩 들어왔던 채널이다. 거기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철학을 공유해줬다.
길지 않은 책이고, 간만에 옛 정치학도로서의 들끓는 마음을 상기시켜주는 책이었다.
역시 생각날만한 구절만 남긴다.
(참고로 이 책은 1차세계대전 직후 유럽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책이다)
1.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인간의 삶이 다른 시대보다 더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언급한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양적이거나 잠재적인 측면에서 삶의 전진과 확장이다. 이를 통해 나는 현대인의 의식과 삶의 특색을 정확히 표사했다고 생각한다. 즉 그것은 현대인이 어느 때보다도 더 큰 잠재력을 느끼면서 모든 과거를 시시한 것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 이 구절은 책의 전체를 다 읽고 나서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20세기초 유럽의 시민이나 21세기 한국의 시민이나 본질적인 사고는 동일하다는 것. 우리는 지금도 10년 20년 50년 100년 전의 사람보다 지금의 우리가 더 나은 인간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것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주어진 것에 만족하면서 말이다. 오히려 숭고한 목적, 확실한 신념이 조롱거리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2. 더구나 우리 시대는 과거 전체를 간과함으로써 고전적, 규범적 시대를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과거의 모든 시대보다 우월하기에 그곳으로 되돌아갈 필요 없는 새로운 삶이라고 인식한다.
- 되돌아갈 필요야 없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이 우월하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현대에 와서도 고전이 읽히고, 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것은 그 떄나 지금이나 본질적인 것이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원죄나 숙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 우리는 이상을 실현할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시대에 살고 있긴 하지만 무슨 이상을 실현해야 할지는 정작 모르고 있다.
- 갈 길을 모른다는 것. 우리가 갖고 있고, 쓸 수 있는 자원은 무한해져가고, 지식에 대한 접근은 해제되었으나 어딜 가야할지 모른다면 어떤 의미도 가질 수가 없다. 지금의 나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꼈거나, 자신도 모르게 회피하고 있는 진실
4. 다시 말해서 정부의 구성이 현재의 시급성 때문이지 미래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정부의 활동은 매시간 갈등의 회피에 국한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피하는 것이다. 잠시 후에 더 큰 갈등에 빠질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다. 대중이 공적 권위를 직접 행사할 때는 언제나 그러했다. 전능하면서 단명했다. 대중은 삶의 계획이 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가능성과 권력이 아무리 막대하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건설하지 않는다.
- 민주주의 체제아래에서는 불가피하게 다음의 선거, 다음의 정권을 위해 국민의 고통을 수반하는 정책을 취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국가 체질 개선을 위해(성공적이든 아니든) 취한 정권은 그 공적을 인정받는다. 영국의 대처, 독일의 하르츠 개혁, 어쩌면 박정희 정권까지도. 개인적인 판단이다.
- 나는 한국정치가 노무현 이후로 멈춰있는 것 같다. 본인의 지지기반이 반대하더라도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한미 FTA를 시작했다. 나라의 더 큰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정권들은 대부분이 포퓰리즘적 대안만을 제시한다. 부동산의 상승을 부추기고(혹은 억제하지 못하고), 현금성, 선심성 사업을 벌이고... 거대한 가치를 잃어버린 것만 같다. 보수와 진보의 견해는 너무나도 벌어져서 정권이 바뀔때마다 휙휙 전 정권의 치적을 지우기 바쁘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계획없이 표류하고 있다. 정권 이전에 나라살림을 꾸리고 있던 엘리트 공무원은 이젠 대부분 과도한 책임과 부적절한 보상으로 떠나버린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 때리기 쉬운 공무원, 군인, 경찰, 부려먹기 쉬운 공기업, 공공기관이 정권의 인기몰이에 사용되고 나자 이제는 나아갈 동력을 잃은 것은 아닐지.
5. 대중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선택된 인간의 경우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허영심이 필요하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그와 맞지 않으며 솔직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영심에서 나온 것이고, 허구적이며 환상적이고 미심쩍은 것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타인을 필요로 하며 타인 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기 관념을 확증받고자 한다. 그래서 고귀한 인간은 이런 병적인 상태나 허영으로 눈이 먼 상태에서도 자기 자신이 진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새로운 아담인 우리 시대의 보통사람은 자기 자신의 완벽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확신은 마치 아담의 낙원과도 같다. 선천적인 마음의 폐쇄주의가 불완전함을 발견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타인들과의 비교를 가로막는다. 비교란 잠시 자기 자신을 떠나 이웃 사람에게로 이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은 최고의 스포츠인 이런 이동을 할 수 없다.
- '기분상해죄'라는 말이 있다. 당신의 말과 행동으로 내 기분이 나빠졌으니 죄를 물겠다는 뜻이다. 그만큼 요새의 사람들은 주변의 평가에 취약하다. 걔중에는 분명 말도 안되는 평가와 언행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이 이렇게 치우쳐져 있다보니 오히려 정말로 피해를 입은 사람의 본심을 의심받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고는 한다.
- 나의 불완전함을 발견하고 개선해나가는 것이 '어른' 혹은 성숙한 사람의 모습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나 또한 반성하고 노력해야하는 부분이다. 다만, 내 자존감을 모두 꺾고 자신을 지나치게 의심하여 가스라이팅 당하는 수준까지 가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용이 중요하다.
6. 만일 단순한 부정으로 과거를 말살할 수 있다면 모든 문제는 매우 간단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란 본질적으로 유령과 같다. 아무리 내동댕이쳐도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따라서 과거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유의하고 과거를 고려해 처신함으로 그것을 멀리 피하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갖고 '시대의 높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혁신의 혁은 가죽혁(革)을 쓴다. 가죽이 다른 무엇인가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을 혁신이라고 한다고 한다. 새롭게 무엇이 되기 이전에 과거의 무엇이 있기에 차별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알아냄에서부터 시작하여 더 나은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 있다. 저자는 온고지신의 태도를 어려운 말로 얘기하고 있는 것 같다.
- 길을 잃었을 때는 고전으로 돌아가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일맥상통하는 말인듯하다.
7. 과거는 그 나름대로의 정당한 이유를 갖고 있다. 만일 그것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다시 요청할 것이고, 나아가 정당하지 않은 것까지 들이댈 것이다. 자유주의도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정받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은 것은 제거해야 한다. 유럽은 자유주의의 본질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조건이다.
- 조금 더 나아가서, 정당한 것과 정당하지 않는 것의 구분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 정당함을 구별하는 도덕을 설정하는 주체는 누가 되고, 그걸 보편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가? 저자의 책 전반에는 엘리트주의가 깔려있다. 사회를 이끄는 니체적 인간들이 고통이 예상되더라도 이상향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 어쩌면 책의 핵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엘리트주의를 기본으로 가져간다면, 정당성을 정하는 누군가는 그들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시민들은 과거와 같이 쉽게 감응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흘러다니고 있고 더 많은 기회가 열려 있다. 본인들의 생각은 더욱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그렇기에 결국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면 아무리 옳다한들 금새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 그만큼 요새는 사람들의 마음을 (진실된 팔로우십을) 얻기가 힘들다. 그래서 힘있는 자들은 오히려 엘리트가 되길 포기하고, 본인의 만족만을 위해 살기를 선택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아예 신물이 나게 만들어서 본인들의 권력을 지키려하지 않나 싶다.
8. 대중의 심리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 선천적이고 근본적으로 삶이란 수월하고 풍요로우며 비극적 제한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갖고 있다. 따라서 평균인은 그 내면에 지배의식과 승리감을 갖고 있다. (2) 이런 지배의식과 승리감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게 해주고, 그의 도덕적, 지적 자산을 완벽하고 훌륭한 것처럼 여기게 만든다. 이런 자기만족이 외부의 견해 일체를 거부하게 하고 귀기울이지 않게 하며, 자신의 의견은 의문시하지 않은 채 다른 의견을 무시하게 만든다. 그 내면에 있는 지배의식은 끊임없이 그를 부추겨 지배력을 행사하게 한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마치 자신과 자신의 동료만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3) 그 결과 신중함이나 심사숙고, 절차나 유보도 없이 '직접행동'체계에 따라 매사에 개입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다.
- 이러한 시민들이(혹은 대중이) 진정한 고난을 맞이할 경우에 어떤 모습을 보일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고난이 온다하더라도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 고난을 이겨내왔다. 우리의 조부모님세대는 전후 복구를 훌륭하게 수행해 냈으며, 부모님 세대는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이후의 세대도 (항상 다가오고 있는) 다가오는 경제위기와 코로나를 겪었기에 삶이란 수월하고 풍요롭다는 생각은 아마 아직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진정으로 따를만한 리더가 없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우수하고 대한민국을 다시한번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줄 리더가 어디 없을까.
9. 우리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인생이, 결핍과 투쟁의 와중에 있는 인생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다리라고 행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 고귀하다는 것은 본인의 책임을 다하고, 신념을 지키고, 남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자는 행복하긴 하겠지만 더 나은 인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상황, 경험과 자본(인적, 물적)이 다르기 때문에 인생간의 비교가 애초에 넌센스이긴하나, 보통 영웅은 난세에 나타나지 평상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10. 가능성이 과다한 세계는 자동적으로 심한 기형과 사악한 유형의 인간을 만들어낸다.
- 와이프와 얘기를 하다가 요새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힘든 것 같다는 말을 나눴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때로는 힘들다고 얘기하는 모습을 보니 어딘가 마음이 짠하다.
11. 운명이란 하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할 때 분명하고 엄격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 하기싫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사람이다. 하기 싫더라도 하는 사람을 나는 니체적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나 자신을 초월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런 것들이 모이면 사회 또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12. 지금 어릿광대극의 회오리바람이 유럽 전역을 휨쓸고 있다.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입장은 대개 그 자체가 거짓이다. 그들이 경주하는 유일한 노력은 운명 자체를 회피하고, 명백한 증거와 내면의 소리에 눈과 귀를 멀리하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모습과의 대면을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쓰고 있는 가면이 외견상 비극적일수록 더욱더 희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 조건 없이 투신하지 않는 미지근한 태도로 살아가는 곳에는 언제나 희극이 있다. 대중은 운명의 확고한 지반 위에 발을 내딛지 않는 공중에 매달린 허구의 삶을 즐긴다.
- 20세기 초 유럽의 시대상황에 나온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면 이것은 체제의 문제다. 그 때와 지금 같은 것은 자본주의 기반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니, 그러한 시스템 밑에서는 불가피한 모습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욱 본질적으로 인간 자체의 본성이거나.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3000년전 이집트 석판에도 요새 것들은 게으르다는 말이 적혀 있다고.
13. 사실 친위대로는 지배할 수가 없다. 탈레랑도 나폴레옹에게 "폐하, 총검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만 그 위에 앉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배한다는 것은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조용히 행사하는 것이다. 요컨대 지배한다는 것은 왕위, 고관, 의회 각료, 주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소설의 천진난만한 시각이 상정하는 것과 달리 주먹의 문제라기보다는 자리의 문제다. 국가란 결국 여론의 상태이자 균형의 상태, 정적인 상태다.
- 나는 요새 '관(官)'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준미달의 선출직 정치인들이 써내리는 선심성 정책에 공무원들은 욕받이나 될 뿐, 진정한 책임과 사명을 지고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환경이다.
- 어쩌면 이들을 다시 살려야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관이 능력이 있어야 민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짚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아예 민에서 수혈을 하는 것도 방법인데, 밥그릇을 뺏기기 싫은 공무원들은 절대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허용한다하더라도 선출직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게 할 뿐, 진정한 의미로 사용하지는 못한다.
14. 그러나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건강하지 못한 기이한 것이다. 다른 계명이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유럽의 계명이 효력을 상실해보렸다. 유럽이 지배를 중단했는데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유럽이란 무엇보다 그리고 본래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 3개국을 의미한다. 이들 3개국이 차지한 지역에서 하나의 생활방식이 성숙했고 세계는 그에 따라 조직되었다. 지금 얘기되는 대로 이들 3개국이 몰락 중에 있고 그들의 생활방식이 효력을 상실했다면 세계가 타락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리더는 미국이 되었다. 미국식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아마 저자는 어떤 것이든 지배하고 있다면 안정적일 것이고, 나아갈 수 있다고 할 것 같다. 방향이 어찌되든 말이다. 멈추면 무너질테니까.
15. 일정한 방식으로 살도록 강제하는 계명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히 제멋대로의 상태에 놓인다. 이것이 세계의 우수한 청년들이 직면한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속박 없는 완전한 자유는 공허감으로 이어진다. 제멋대로의 삶은 죽음보다도 더 큰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왜냐하면 산다는 것은 뭔가 특정한 것을 해야 - 임무를 성취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우리 삶에서 어떤 짐을 짊어지길 회피하면 회피할수록 삶은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얼마 안 있어 지구상에는 마치 무수히 많은 개들이 짖어대는 것처럼 별나라까지 올라갈, 누군가에게 그리고 뭔가에 지배해달라고, 할 일과 의무를 부과해달라고 요청하는 무서운 외침이 들려올 것이다.
- 거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생각은 사람을 어떤 방향으로든 움직이게 한다. 그것이 착각인지 진실인지 확인해줄 주체가 없다는 것이 문제.
- 근대사회는 거대한 계획의 일부라는 것에 반대하고 개인의 선택과 개성이 삶의 지침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됐다. 이로인해 청년들은 갈 길을 한번 잃었고, 파시즘이 그 자리를 채워주었다.
- 혼돈의 시기가 지나고 현대로 접어든 이 시점에 우리는 다시 가치의 혼란을 맞이하고 있는듯하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추구할 목표가 없다보니 끊임없이 공허하고, 끊임없이 물질을 추구한다. 그나마 나의 안락과 쾌락을 보장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나는 올바른 가치가 다시 세상에 제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수의 가치도 진보의 가치도 맞는 것과 틀린 것은 수정되어야만 한다. 나는 ‘자유와 책임’이 핵심가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위치도 아니므로 이것 외에 다른 가치는 생각의 범위에서 제외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판단기준일 뿐이다.
16. 인간의 삶은 영광스런 것이든 소박한 것이든, 찬란한 운명이든 평범한 운명이든, 본질적으로 뭔가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이것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의 실존에 새겨진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삶이란 한편으로는 각 개인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 때문에 행하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삶이 오직 내게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에 투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긴장도 없고 '형태'도 없이 헐거워진다. 요즈음 우리는 수많은 인생들이 투신할 곳이 없이 자신만의 미로에 빠져 헤매는 엄청난 광경을 목도하고 있다. 계명과 질서가 모두 미해결 상태다. 이것이 이상적인 상황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각자의 삶이 완전히 자유로워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각자의 삶이 해방을 얻긴 했지만 자기 자신을 상실한,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공허한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뭔가를 채워야하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내면의 진실에서 나온 것이 아닌 헛된 것에 몰두한다.
- 작가는 끊임없이 절대적 무엇인가를 좇고 헌신하는 것이 참된 삶의 방법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에 대한 대안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벨 에포크를 그리워하는 늙은 프랑스 여인마냥 ‘그때가 좋았지, 그때를 되살려야지’ 정도로 머무르고 있다. 짧은 책에 담길만한 분량이 아니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으나, 좀 더 도전적이고 참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미래상에 대한 제시는 없다는 점이 아쉽다.
17. 이유 없는 지배는 없다. 지배는 타인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니다. 만일 지배가 이것뿐이라면 그것은 폭력일 것이다. 지배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명령하다는 이중적인 작용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명령한다는 것은 결국 사업과 역사적인 거대한 운명에 참여하라고 하는 것이다.
- 세상은 일반 개인(또는 대중)이 알 수 없는 어떠한 목적과 방향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종점이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알려준다하더라도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거대한 제국의 건설, 인류의 우주 진출 등 이러한 거대한 운명이 개인의 가정과 삶에 헌신을 요구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명예, 자긍심이라면 그것은 어떠한 개인 또는 조직의 욕심에 희생된 피해자에 불과하지는 않을지
헌신 그 자체에 인생의 목표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기본적으로 인간은 노예의 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18. 두뇌가 명석한 사람은 이런 환각적인 '견해'에서 해방되어 삶을 직시하고 만사가 문제투성이인 것을 깨달으며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다고 자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순수한 진리- 이를테면 산다는 것은 길을 잃어버렸음을 자각하는 것이라는 사실- 이기 떄문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미 자신의 진정한 현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고 견고한 지반에 서 있는 셈이다......진짜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는 사람은 길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현실 그 자체를 결코 발견할 수 없고 그것과 마주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 그렇다. 내가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없다면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인생을 해파리처럼 둥둥 떠다닌다고 해서 나쁠 것은 무엇일지, 사람과 해파리 모두 이 세상 스쳐지나갈 뿐인데 어떤 의미를 갖자고 투쟁하며 살아야만 하는지 고민이다.
19. 거듭 말하지만 이른바 국가의 실재는 혈연으로 맺어진 인간들의 자발적인 공동생활이 아니다. 국가란 본래 분리된 집단들이 공동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시작된다. 이런 강제는 노골적인 폭력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집단을 위한 선동적인 계획과 공통의 과업을 상정한 것이다. 국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활동 계획이자 협력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뭔가를 함께 하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국가는 혈연관계도 단일한 언어도 아니며, 단일한 지역도 인접한 거주지도 아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도 불활성적인 것도 아니고, 주어진 것도 한정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동력 - 뭔가를 공동으로 하겠다는 의지 - 이다. 그래서 국가의 이념은 어떤 물적 조건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20. 국가는 사물이 아니라 운동이다.
21. 전진하려는 충동이 멈추면 국가는 자동적으로 쓰러지고 이전에 존재한 물질적으로 굳건해 보인 단일성 - 인종과 언어, 자연 국경 - 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 아메리칸 드림이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유, 정당한 국가시스템과 기회가 주어진다면(혹은 주어진다고 생각하게끔 한다면) 국가는 유지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현재 처한 상황은 어쩌면 경제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리더의 부재, 추구할만한 가치의 부재, 결국 목표의 부재이지 않을까 싶다.
- 우리 조부모 세대는 전후복구, 경제발전, 잘먹고 잘살자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고, 성공했다. 우리 부모 세대는 민주화, 자유, 평등, 복지 등 삶을 이루는 또다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고, 성공했다. 우리는 이제 일반적인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모두 갖춘 나라에 살고 있는 세대가 되었다. 이제는 어떤 걸 추구해야할지... 이제까지 주어진 정답을 좇아 살고 있던 국민들에게 이제는 너만의 정답을 찾아보라는 논술형 문제가 주어졌다. 방황할 수밖에 없다.
- 국가는 사물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을 보니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말이다. 이제는 뭔가 좇아야할 미래를 제시해야 하나, 그러한 청사진을 내비칠 수 있는 능력있는 집단 또는 개인은 실종되었다. 아니면 모두가 ‘능력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상황인지도 모른다(작가가 대중의 특징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말이다).
- 결국 대한민국의 엘리트가 주장하는 국가동력은 ‘위기’의 일상화라고 생각한다. 희망적인 메시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힘드니, 국가가 최소한 멈추지 않기 위해 위기를 빙자한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본다. 위기의 제시는 현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희망의 제시가 앞으로 혹은 옆으로 혹은 뒤로든 어떤 방향이든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이다. 정치적 메시지는 희망으로 재편되어야 마땅하다.
22. 국가는 공통의 과거를 소유하기 이전에 공동체를 창조해야 햇고, 공동체를 창조하기 이전에 그것을 꿈꾸고 바라며 계획해야 했다. 국가는 그 자체의 계획이 있으면 존재할 수 있다.
- 그 나라의 계획은 헌법에 있다. 우리나라는 대륙법계다. 헌법에 명시된 것의 다른 해석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다. 헌법재판소가 있으나 이들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다. 반면에 미국과 같은 영미법계는 연방대법원의 판례가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며, 살아서 움직이는 헌법이 된다. 별도의 개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비상계엄 사태가 있고 나서, 일부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제6공 헌법체제의 본질적 한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라고 평가한다. 인권, 자유권과 같은 기본적인 내용은 그대로 두되, 국가권력을 어떠한 방법으로 재구성하여 좌우 대립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다시 반영된 헌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선거구제 축소와 비례대표제 확대/ 대통령의 연임제/ 헌법 기관의 권한 축소 또는 확대 / 감사원의 완전한 독립 등이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3. 오직 대륙의 여러 민족 집단으로 하나의 거대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결정만이 유럽의 맥박을 다시 뛰게 만들 것이다. 유럽이 다시 스스로를 신뢰하고 그에 따라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자진해서 단련을 시작할 것이다.
- 정복을 국가의 목표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니, 유럽연합 구상의 기초가 보이는 구절이었다. 유럽은 연합이 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영국이 제외되어 버렸고, 경제 동력은 상실한 상태.
이 상황을 저자가 봤다면 어떤 대안을 제시할지 궁금했다.
24. 사람들은 우습게도 '청년'을 자처한다. 왜냐하면 의무 이행을 원숙기까지 무기한 연기할 수 있어서 청년에게는 의무보다 권리가 더 많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청년은 이렇듯 현재나 과거의 공적에서 언제나 자유로운 것처럼 생각되었다. 청년은 항상 신용으로 살아왔다. 그것은 청년이 아닌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허용한 반쯤 얄궃고 반쯤 애정어린 허위 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은 뭔가를 성취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온갖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 그것을 유효한 권리로 받아들이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청년을 자처하는 이유가 새로웠다. 청년이란 것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핵심적인 내용은 청년의 권리는 그들의 특성 때문에 허위 권리와 같은 것이라는 것. 책임 없는 자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청년은 진정한 권리라고 착각하고 행동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많은 이들이 청년을 자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