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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이아저씨 Sep 25. 2024

왕십리

당신을 기억할 때 6

 하나의 공간에는 수천 수만의 기억이 담기고, 
 수천 수만의 기억에는 하나의 공간이 담긴다. 
 우리는 짝으로 담았다. 
 우리는 20대의 첫머리에 이곳에서 만났다. 지난 시간동안 많은 게 변했다. 




너와 나는 나이에 걸맞지 못한 어른이 되었고, 왕십리엔 없던 도로와 이색적인 건물이 들어섰다. 

우리가 자주 가던 가게는 어느새 다른 간판을 내걸었고, 또 다시 다른 간판을 내걸어, 같은 장소는 다른 장소로 두번 세번 연거푸 바뀌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그때마다 새로운 간판을 새로운 기억에 담았다. 왕십리를 구성하는 수많은 개체들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가게도, 사람도, 도로도, 지역도, 상권도 모두 바뀌었다. 우리를 정의하는 말들도 계속 변했다. 그럼에도 짝으로 담은 기억은 언제나 왕십리를 왕십리로 바라보았다. 도선, 행당, 상왕, 하왕, 마장, 성수, 금호, 사근, 모두가 왕십리의 품안이었고, 우리 또한 그 품 안이었다. 10년의 시간동안 불안에 떨며 소리를 지른 곳도, 첫경험의 시발점이 된 곳도, 하늘높이 학사모를 던져올린 곳도, 사회인으로 발돋움한 곳도, 더 먼 미래를 약속한 곳도 모두 이곳이었다. 


이젠 이곳을 떠난다. 이전까지 쌓아왔던 때묵은 감정들, 옳지 못한 행동들, 서로의 마음을 항해 겨누던 칼날들을 뒤에 두고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마냥 사랑만 가득했던 곳이라면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막상 마음을 먹고 나니 그간의 기억과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함께 거닐며, 행복했던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고 서로가 서로에게 내버린 상처의 고름들은 두고 갈 심산이다. 


이 글을 네가 읽으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기록해 두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그 과정 중에 남긴 상처들은 평생을 함께하기 위해 꼭 알아 두어야 하는 기록이니까. 그래야 새 삶을, 새 터전에서 온전하게 뿌리내릴 수 있을 테니까. 

“돌이켜 봐. 나는 항상 상황 탓을 하며, 네게 나아질 것이라고 입에 발린 말만 덧칠했고 너는 자가치유능력을 상실한체 세상을 맴돌았어. 와중에 사랑을 하고, 서로를 의지했으니 여기까지 온 거지 서로에 대한 믿음 없이 도돌이표 따라 인생이 반복됐다면 우리는 무너지고 말았을 거야.”

왕십리는 그래, 20대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감정과 노력이 서려 있는 곳. 우리에겐 그런 곳이다. 어느 날, 그 때 그 장소가 그리워지면, 우린 아마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 때는 그 모든 감정이 극복되고, 그 모든 노력들이 결실을 맺은 때이겠지. 


새 역사의 첫번째 페이지는 옛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이니까.

내 두번째, 우리의 두번째 고향. 안녕, 왕십리. 


2022년 여름장마, 왕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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