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심장에 우뚝 서다
나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작은 면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은 규모가 더 큰 동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남양주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마을은 지금도 머릿속으로 온전히 다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곳이다. 우리 집에서는 논이 보였고, 도처에 배 밭이 있었다. 먹골배는 남양주가 자랑하는 특산물이기 때문이다. 서울 보통의 동네에 다 있는 편의시설이나 체인 음식점은 나에게는 전부 사치였다. 매우 불편하게도 우리 가족은 외식을 하려면 매번 차를 타고 근처에 가장 큰 번화가인 구리시까지 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곳에 사는 게 행복했다. 집 근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판잣집에서 장사하는 분식집의 떡꼬치, 그리고 집 앞에 있는 오래된 빵집에서 파는 시폰 카스텔라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가끔씩 들었던 생각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 거실에는 거대한 세계 지도가 붙어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지도 앞에 쪼그려 앉아 매일매일 세계지도를 쳐다봤다. 어느 정도냐면 하도 지도만 보고 있어서 외우려고 하지 않았는데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의 수도를 외워버렸다.
여러 나라들을 알게 되니 자연스럽게 저 나라들은 어떠한 곳일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많이 봤던 것이 바로 KBS의 여행 다큐멘터리인 ‘걸어서 세계 속으로’였다. 우리나라 흔한 아이들처럼 나 역시도 맨날 놀이터에서 놀기나 하던 개구쟁이 소년이었지만,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볼 때만큼은 지금 나이의 나처럼 진지하게 봤던 것 같다. 여러 나라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은 참 넓고 다양한 곳이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했지만, 현실은 큰길 두 개가 다인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름다운 곳들을 누비겠다는 상상은 고이 접어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휴지통으로 던져버렸다. 내 꿈도 딱 내가 사는 곳 정도 수준으로 맞춰야 했다.
시간이 지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의 세계가 확 넓어진 계기가 됐다. 서울에는 멋진 곳도 많고, 맛있는 식당도 정말 많았다. 대학 동기들은 대학 주변에 뭐가 없어도 너무 없다고 한탄을 했는데, 대충 수긍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했다. 솔직히 나한테는 너무 좋았다. 내가 살던 곳에 비하면 서울은 어디를 가도 호화스러웠다. 도대체 어떻게 한 도시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살고 건물이 많은지 신기했다. 많은 사람이 산다는 건 다양한 시설, 산업, 직업군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서는 길거리를 지나가면서 사람들과 건물만 봐도 내가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 너무 많았다. 비로소 신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어느덧 내 꿈은 서울 정도의 크기로 커져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지워지질 않았다. 아무리 서울에 천만 인구가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서울에 만족하며 잘 살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어린 나이부터 직감했다.
드디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섰다. 내가 공부하며 지내고 있는 셰필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런던에 와서야 느끼게 됐다.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느낌이랄까. 가슴 깊숙이 벅찬 감정이 밀려왔다. 런던, 말이 필요 없는 도시 아닌가. 한때 세계를 제패하고 다녔던 나라이고 지금도 세계적인 규모의 도시이다. 그런 곳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트라팔가 광장에 남양주 작은 마을에서 온 소년이 서있는 것이다. 비록 학생 신분으로 영국을 온 것이라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나의 어릴 적 소망을 이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까지 가야 그 꿈을 완전히 이룬 것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가까이 온 게 아닐까 싶어 흐뭇하고 벅찼다. 남양주 배 밭에서 배 따던 꼬마, 이 정도면 출세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에서 평생을 살게 될 터이니 언젠가는 영국에서의 시간도 젊은 날의 추억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 끝까지 기억될 것은 세상은 무궁무진하게 넓다는 것이다. 이제는 텔레비전에서 봤던 것을 넘어 내 몸이 직접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속한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직접 드넓은 세상을 누비게 되니 나의 한계가 없어진 느낌이다. 한국에서 살더라도 이제 더 이상 나를 가로막을 것은 없다. 큰 꿈을 꾸기 시작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