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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Apr 26. 2024

책은 장식이 아니다

우리는 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예쁜 옷을 보는 것처럼, 책도 그럴 수 있을까? 보고 싶고 입고 싶은 옷. 만지고 싶은 옷 사고 싶은 옷. 옷을 대하는 마음처럼, 책을 대하는 마음이면 어떨까. 옷을 보듯 책을 보는 마음이면 어떨까.


7~8년 전 방문간호사를 하던 시절, 뒤에서 차를 들이받는 사고로 나는 집 근처에 위치한 한방병원에 몇 주간 입원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었지만, 온몸이 경직되고 차는 말 그대로 폐차 직전이었다.

한방병원은 오래되기도 했지만, 세월의 흔적을 넘어서는 더 오래된 분위기가 있었다. 책도 그중 하나였다. 외래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면서 옆을 보는데 책이 있었다. 2~3칸짜리의 낮은 책장에 오래된 책들이 꽂혀있었다.

당시 나는 책의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던 시기였고, 병원에 몇 주간 입원해있어야 해서 책이 보고 싶었다. 외래대기실 책장에 있던 책들은 낡고 오래되어서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마음에 가지 않는 옷이 있듯이 책도 그렇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사실 별다르게 할 건 없었다. 매일오전 7시경 영양사님이 가져다준 큰 대접 같은 그릇에 죽을 맛있게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전에 물리치료를 받고 병원 근처둘레길을 작게나마 산책을 하고, 가끔 빼꼼히 보이는 귀여운 고양이들을 관찰하기도 했다. 남편에게 혹시 남동생에게 집에 있는 책을 가져 다 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는데, 그 당시 읽었던 책들이 좋은 기억에 남아있다. 병원 외래대기실에 놓여있던 책은 '있어도 보지 않는' 책이 되어버렸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공간이 있을까? 옷걸이에 걸쳐있어도 입지 않는 옷처럼, 어느 순간 내 마음에 들어서 산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이 되어버리는 순간도 있다. 그 순간은 진심이었을 거다. 책을 사는 순간도 책을 만지는 순간도.


진열만 되어있는 책도 있고, 어느 창고에 갇혀버린 듯 먼지만 쌓여있는 책도 있다. 혹은 인테리어나 장식을 위해 책을 이용하기도 한다. 마치 옷매장 한쪽 공간을 차지한 쇼윈도처럼 말이다.


침대나 책상을 고르기 위해 인테리어 대표매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침대공간 한편에 책장이 있고, 그곳에 책이 아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가짜 책이다.

빈 박스형태의 그 책은 안이 비어있는 장식품이었다.

실제 우리가 거주하고 생활하는 침실공간은 전혀 이렇지 않다. 옷가지가 의자나 침대에 널브러져 있기도 하고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알 수 없는 잡동사니 짐들로 공간이 채워진다. 인테리어 매장을 방문하거나 모델하우스를 방문하면 우리가 환호성을 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일단 그곳에는 잔짐들이 없다. 은은한 조명한 깔끔한 인테리어 그게 전부다.


내가 운영하는 책방 근처에 통신사대리점 진열대에도 책 모조품, 책 장식품이 진열되어 있다. 겉에서 보기에는 책인가? 책인 듯 아닌 듯 장식품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다. 만약 저곳에 진짜 책이 있다면 어떨까? 고객들이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 재미있는 책이 (정말 볼 수 있는 책이) 진열되어 있다면 어떻까?


기다리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 않을 거 같다. 혹은 핸드폰만 보고 있으려나? 인테리어매장 이든, 통신사 대리점이든 가짜 모조품과 같은 책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고, 즐길만한 책이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책방을 오픈한 이후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빵집이든 카페든 옷매장이든 책을 진열해 둔다. 지금은 그림책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책에 관심 있는 사장님이 요청하기만 한다면 다양한 책을 진열해보고 싶다.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자기 계발서도 좋고, 에세이도 좋고 소설책도 좋겠다. 사실 책은 인테리어 하기에도 참 좋은 것 같다. 책의 표지를 보고 책을 고르듯, 책 표지만 보아도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기분이 든다. 특히 그림책이 그렇다.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주면서 우리 어른들도 다시금 그림책에 빠져든다. 그림책을 제대로 알기 시작하면 그림책이 다시 보인다. 하나의 그림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하고 편집하고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림자체가 아름다운 그림책이 있고, 색감이 고운 그림책이 있고, 아이들과 함께 보기 좋은 그림책이 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다가 그림책의 매력에 빠지고 그림책의 재미에 빠져든다.


마음이 가는 옷이 있듯, 마음이 가는 책이 있다. 물건을 샀지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 있는 것처럼, 책을 샀지만 다시 펼쳐보지 않는 책도 있다. 옷은 우리의 몸을 감싸고 외형을 꾸민다. 책은 우리의 정신을 감싸고 마음을 다진다. 책은 그런 거다.


옷도 책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책과의 만나는 순간이 진심이듯 이별하는 순간도 진심이다. 사람과의 인연도 그 순간에는 진심이다. 정말 이 사람이 필요했고, 조언이 절실했으며 만남 그 자체에 진심을 다했다. 진실했던 관계가 이별하는 순간도 온다. 진심이었던 순간이 보내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럴 때 참 고마웠다고 말한다. 또 다른 인연이, 사람이 올 거라는 기대감도 생긴다. 인간관계에 대해 사람에 대해 진심과 고마움, 헤어짐과 다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책과의 만남도 그렇다. 내가 만진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고, 책을 통해 알게 된 생각이나 깨달음을 통해 내 안의 무언가가 채워지고 변화되는 것을 느낀다.

나와 아이들이 함께한 책을 떠나보낼 때도 온다. 전집을 정리할 때가 그랬고, 책장에 안 보고 꽂혀만 있던 책을 정리할 때도 그랬다. 책방 한편을 채우고 있는 책들을 보면서 만남과 정리, 이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너희들과 이별할 때가 온 것 같구나 하고 말이다.


내가 평생 소장해야 할 책은 한편에 비치해 둔다. 나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책이 있고, 내 곁에 남는 책이 있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 있었고 관계를 정리하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옷을 만나던 순간, 책을 만나던 순간, 사람을 만나던 순간, 그 순간에 진심이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옷을 입고 참 좋았던 느낌, 책을 만나 참 설레었던 기억들, 사람을 만나 참 좋았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이루고 나를 채워간다. 그리고 빈 공간에 또 다른 인연이 차곡차곡 채워진다.


오늘의 내가 그렇듯, 당신의 일상에도 진심 어린 순간들이 깃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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