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가 죽었다.
해피는 언니의 애완견이름이다.
유명을 달리한 해피의 설움인지 어린이날 연휴에
비가 지루하게도 이틀 째 내렸다.
비 예보에 손자녀의 어린이날 행사를 미리 당겨서 할 만큼 다정한 언니가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해피가 죽는대.
폐에 물이 찼대.
오늘을 못 넘긴대."
내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내용을 심각하게 울먹이며 전화를 했다.
언니에게 전혀 도움이 안되겠지만 나의 대화는 뻔했다.
"모든 생명체는 왜 태어나는 줄 아나?... 죽으려고 태어나는 거야."
"죽음을 우리가 어찌 말려. 울지 말고 기도나 해줘"
"산사람이 할 수 있는 건..."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언니의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너무 못해줘서... 흑흑."
"내 옆에 와서 비비며 칭얼댈 때 그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흑흑"
"매몰차게 귀찮게 하지 말라고 밀어내기만 했어. 흑흑"
"불쌍해 죽겠어. 흑흑"
큰일 났다. 그녀의 슬픔이 빨리 멈출 것 같지 않다.
더 문제인 것은 내가 언니의 그런 슬픔이 크게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늘 그랬다.
지나치게 잘해주고 지나치게 자책하며 지나치게 반성이 빨랐다.
그것뿐이 아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인간답지 못하다고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언제나 공감해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왜 매 번 언니의 다정다감한 일상사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었을까?
나의 사고에 있는 해피의 기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상식으로 해석해 보면 나의 해피가 죽어있기 때문이다.
해피?
해피가 뭐야?
각 자가 꾸리는 대로 꾸려지는 꿀단지!
해피는 모든 이에게 꿀단지여야 한다.
누구든지 꿀단지는 애지중지하지 않는가.
주변을 애지중지하다보면 어느 새 행복이 가까이 와 있으니까.
언니의 감정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언니가 애지중지하는 꿀단지와 내 꿀단지 해피는 언니랑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언니의 꿀단지는 늘 가까운 사물 및 사람들과의 정 나눔, 관계중심적 도리 등이다.
내 꿀단지는 내 중심의 일상사, 취미생활, 목표지향적인 나의 일, 내 관리 등이다.
언니 편에 서서 구태여 나를 자책하자면, 애완견 하나 기르지 못하는 내 해피는 살아 있지 않은 해피이다.
그러나 나도 남의 애완견은 예뻐할 줄 안다.
단지, 내 중심의 생활에서 챙겨야 할 게 하나쯤 더 있다는 건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애완견을 기르지 못할뿐이다.
해피는 죽었다.
언니의 애완견 해피가 죽었든 나의 일상사 해피가 죽었든
암튼, 해피는 죽은 게 분명하다.
어찌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해피를 잃은 언니의 슬픔은 하루빨리 정리가 되고
그냥 그녀의 기억 속에 행복했던 해피와의 모습만 남기길 바라야지.
해피는 죽었다.
그러나 누구든 꾸리고 있는 꿀단지 해피만은 영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