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역사상 만화책이 언제 가장 성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3n 년 동안만 한정하자면 밀레니엄이 도래하기 전, 90년대 후반이 그랬다.
[난... 슬플 때 힙합을 춰. 아무도 내가 슬프다는 걸 눈치챌 수 없도록....]
sns 감성 이전에 태초의 언플러그드 보이가 있었고 슈퍼스타 K는 황보래용(오디션, 천계영 작)이 있었기에 태어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엄마가 챙겨보는 아침방송에서는 새천년의 희망이라는 코너가 생겼고 무슨 일을 한다는 건지 감도 오지 않는 닷컴 회사들이 매일 새롭게 등장했다. 개인정보의 중요성을 아직 몰랐던 그 시절, 교복 입은 우리들(언니와 나)은 만화책 대여점에 개인정보를 순순히 헌납했다. 정확히 말하면 뿌리고 다니는 수준이었다. 대여 권수는 정해져 있고 연재물은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므로 다 읽었으면 바로 다음 권을 이어 빌려야 했다. 하지만 내가 꼭 봐야 하는 그 책이 대여중인 상황이라면? 중학생의 평균적인 인내심으로 하루를 기다렸던 날, 세상은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다는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당장 다른 대여점으로 가야 한다. 여기도 없다면 또 다른 대여점... 이런 식이므로 개인정보를 한 곳에만 흘려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소 세 군데, 여유 있게 다섯 군데에 회원증을 만들어놔야 청소년기 독서의 흐름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2인 1조 기 때문에 다섯 이상의 대여점에 우리 집 주소와 전화번호, 학교 정보를 심어놨다.
완결이 아닌 만화책인 경우 몇 달만에 다음 권수가 들어오기도 했다. 새 책을 가장 먼저 읽는다는 것은 아직 접힌 자국이 없는 신성한 표지에 수직선으로 된 나의 독서기록을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처음 한 명에게만 수여되는 그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사장님들과 친해져야 한다. 나는 당시 드라마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실장님이란 호칭을 쓰며 세련되고 교양 있는 중학생으로 포지셔닝했다. 대여점에서의 교양이란 반납일을 칼같이 지키며 빌린 만화책은 절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유기농 인증이 가능할 만큼 친만화책적 자세로 신뢰를 쌓아갔고 경제위기 이후 대여점을 차리신 실장님들과 상생하는 감정까지 들기도 했다. 내 어깨가 무거워진 것이다. 중학생이 하교 후 사 먹는 피카추 돈가스와 컵떡볶이는 간식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미래와 과거를 이어주는 소품이었다. 앞으로의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해 동급생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가 하면 초등학교 시절에 먹던 것보다 매운 소스를 바르며 나의 성장을 중간 평가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쇼트트랙의 계주 경기로 치자면, 책 대여점이라는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실장님들을 세게 밀어줘야 한다. 중학생이라면 경제위기를 함께 이겨내야 할 의무가 있다. 분식집에서 꼬치 하나씩 들고 제물포 선생님(쟤 때문에 물리 포기했어의 준말. 선생님 죄송합니다...)에 대한 험담을 하는 대신 나는 대여점으로 달려간다. 실장님을 밀어주기 위해.
그날도 하굣길이었다. 습관이 되어버린 탓에 빌리거나 반납할 책이 없어도 대여점에 들렸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실장님께서 말을 걸었다.
"이거 10권 들어왔는데 볼래?"
"홍... 차.. 왕자... 저 그거 안 읽어봤는데요. 제목도 이상하고 제 스타일 아닌데요."
"와... 이걸 안 봤다고...???"
마치 만화책 계의 아마겟돈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였다. 갑자기 애송이가 된 기분에 단단히 자존심이 상해 용돈을 털어 홍차 왕자를 빌렸다. 오늘 들어온 빳빳한 표지의 10권까지 모조리 다.
홍차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웬 홍차 왕자...
음 뭐.... 왕자들 훤칠하니 그림체는 합격. 주인공이랑 학년도 같으니 동질감 합격. 중간고사도 있으니 대충 X자로 훑어 읽고 실장님한테 시시하다고 말할 요량이었다.
첫 장의 문장.
[보름달이 비치는 컵 속을 은스푼으로 한번 저으면 달은 일그러진다. 그리고... ]
난 이 문장을 읽자마자 만화책 인생 3년 동안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기운을 느꼈다. 어두운 무대, 나와 홍차 왕자만을 향한 원포인트 조명. 어디가 연기가 피어나고 곧 나를 휘감는다. 이 시간은 분명 영원할 것이다. 따라서 내일 보는 시험도 어둠 속으로 흘러들어 갔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족은 제각기 다르다.'는 안나 까레리나의 첫 문장도 나에게는 보름달 뒷자리다. 홍차인지 보리차인지 뭔가가 든 컵 속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지지 않나? 그걸 한 바퀴 저어 본다. 심지어 은수저로. 곧 달은 일그러지며 찻물에 섞인다. 가히 주술사에 한 획을 긋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보다 드라마틱한 문장은 찾기 힘들다.
그렇다. 왕자 따위의 이야기 말고 중학생의 수준에 맞는 책을 추천해 달라며 채근하려던 계획 대신 '11권 언제 나와요? 나오면 제일 먼저 연락 주세요 네?'라는 협박조의 서평만 늘어놓게 된다.
해를 넘겨서야 11권이 나왔고 고등학생이 된 나는 전처럼 대여점에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방학이면 1권부터 새로 발간된 권수까지 빌려 나의 홍차 왕자들을 꾸준히 소환했다.
그렇게 몇 달에 한 번씩 발간된 홍차 왕자는 2004년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25권 완결이 발매되었고 용돈 사정이 좋아진 나는 전권 소장이라는 인생의 자랑거리를 하나 만들게 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생 함께할 소우주를 만났다는 것이다. 하나를 알면 두 개가 궁금하고, 알면 알수록 조심스럽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세계. 차나무의 찻잎으로 시작해서 백차, 녹차, 청차, 홍차, 흑차로 광대하게 확장되는 차[Tea]라는 세계 말이다.
만화책으로 시작되었지만 나는 홍차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내가 소환한 홍차 왕자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