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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모다 Jun 24. 2024

기적이 아니고 훈련 2

기적의 씨앗은 내 안에 

기적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영화 <듄 2>를 보는 중 나의 눈을 끌었던 대사이다. 아주 먼 미래의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듄 2>는 행성을 지배하는 황제의 모략에 의해 멸망하게 된 아크레이데스 가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가문의 유일한 후게자인 폴과 어머니만이 간신이 살아남아 사막지대 아라키스에 도망치게 되는 데, 그곳에서 거주하는 프레멘들과 함께 지내며 재기를 기다린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프레멘들에게 폴은 점점 그 메시야적인 입지를 위한 시험단계를 거치게 된다. 이미 임신한 상태인 폴의 어머니가 그들이 주는 생명수를 먹은 후 죽지 않고 버티는 것을 보고 프레멘들은 기적이라고 말한다. 임신 상태에서 그들이 말하는 파란 생명수를 먹는 것은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놀람에 정작 폴의 어머니는 기적이 아니라 훈련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복잡한 듄의 이야기를 풀어낼 상황은 아닌 듯하고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임신한 사람이 위험한 생명수를 마시는 것과 같은 상황을 대비하여 폴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그 훈련의 힘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을 극복했다는 점이다.



기적의 함정 


놀라운 성과를 내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는 흔히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와 함께 우리는 자주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초월적인 사건이나 영화 같은 장면을 상상한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사건은 한 좋은 예이다. 유대인이 기다리던 메시아(구세주)라면 전능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을 텐데, 당시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엄벌할 수 있는 계획을 세워도 가능했을 텐데,  장차 역사적 성인반열에 오르게 될 예수는 역설적으로 보잘것없는 시골마을출신의 가난한 목수였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사람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의 제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고통의 기도를 올린다. 기적의 장면과는 거리가 먼 과정이 이어진다. 보통 인간의 모습처럼, 그는 모함당하고, 그를 얽어맬 특정한 죄가 없어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로 억울하게 죽어간다. 재판을 맡은 사람들조차도 그의 혐의를 찾을 수 없으나, 유대인의 함성에 못 이겨 사형을 선고한다. 그러나 기록에 따르면, 제자들은 예수 죽음 이후의 부활과 관련한 목격을 통해 그들 삶에 놀라운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들 삶에 일어난 변화가 바로 기적이었다. 그리고 보통 인간으로 죽어간 예수의 가르침은 2000년이 넘도록 인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되짚어 보면 자연스러운 과정이 필요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 역시 죽음이라는 과정을 철저하게 통과했다. 그가 실제로 몸으로 부활했는지 아니면 제자들의 착각이었는지 그런 문제를 논하는 게 아니다. 죽음 이후의 현상들에 대해 여전히 논쟁거리가 많으나, 분명한 것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그와 함께 했던 제자들의 삶에 일어난 변화이다. 더욱이 그 변화는 기적처럼 찾아왔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적 같은 변화 이전에 예수가 걸어갔던 지극히 인간적인, 지극히 자연적인 죽음의 과정이다. 어디선가 죽음을 피해 있다 짠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주어지는 죽음의 과정을 몸으로 겪어 냈다는 데 있다. 


종교와 동화는 자주 우리에게 환상을 준다. 그저 무릎 꿇고 기도만 하면,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다거나, 우렁각시가 나타나 위기를 모면해 준다거나, 모든 논리를 넘어서는 어떤 힘에 의해 세상이 갑자기 바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기적을 다루는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있다. 기적 같은 황홀한 결과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를 암시하는 암호 같은 것들이 숨어있다. 문제는 그 암호를 풀려고 하기보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결과에만 열광하는 데 있다. 바뀔 것 같지 않은 현실을 송두리째 전환시키는, 불가사의한 외부의 강력한 한방을 의존하게 하는 패러다임에 빠져든다. 그 결과, 그런 이야기에 매몰되면, 스스로의 해결책을 강구하기보다,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을 미화하며, 수동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스스로 나서기보다, 그 누군가 강력한 구원투수가 나서야 된다고 믿는다. 그런 자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활력이 없다. 열심히 살지만(기도하지만) 굳어있다. 애쓰지만 매너리즘에 빠진다. 명령에는 잘 따르지만,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은 없다. 변화와 성장이 보이지 않는다. 늘 같은 모습이다. 진짜 기쁨을 모른다. 겉으로는 행복한 듯 하지만, 속으로는 분노와 슬픔과 질투를 묻어두고 산다.  


왜곡된 기적 패러다임은 중세시대를 점철한 종교의 큰 무기였고, 지금도 어떤 면에서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어둡고 폭력적이었던 중세시대의 종교실상을 알리며, 성경으로 돌아오기를 외친 루터는 저항의 아이콘이 되며 종교개혁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종교는 개혁되지 못하고, 다시 중세이전의 어둠에 빠져 있는 듯하다. 기적의 이야기를 제공하는 틀에 갇힌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저쪽 먼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이 바뀌기를, 비가 오기를, 천사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정작 자신의 땅에 씨앗을 심지 않으면서.       



기적의 씨앗은 내 안에 


알라딘의 램프에서 지니가 나와 소원을 물어보는 것처럼, 수염단 산신령이 나와 금도끼 은도끼 주는 것처럼, 현실적인 무기력 앞에서 사람들은 어디선가의 구원을 바라는데 익숙하다. 그래서, 퇴근길에 줄 서서 로또를 한 장 사들고, 내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행운을 기다리는 며칠의 즐거움을 위해 몇 천 원을 지불하기도 한다. 


동화에서 강조되는 기적적인 결과에만 눈이 머물 것이 아니다. 암호를 푸는 열쇠는 의외로 일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지극히 과학적으로, 지극히 이성적으로 열매가 열리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좋겠다. 씨앗을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일구어야 한다. 씨앗을 뿌려야 한다. 그리고 씨앗이 잘 자라기 위한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농부의 노력과 더불어 비와 햇볕이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이 충족될 때 씨앗은 발아하여 열매의 형상을 이룬다.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분명히 원인이 있다. 씨앗 자체의 결함이거나, 농부가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지 않았거나, 자연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거나 하는 것이  원인이 된다. 물론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외부적 요인이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외부의 은총도 준비된 자에게 


농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비와 햇볕이라는 자연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비와 햇볕이라는 외부의 은총도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가 적당히 내리고 햇볕이 제공된다 해도, 뿌린 씨가 없다면, 토양에 결함이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농부의 노력은 자연의 은총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자연의 은총은 농부의 노력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자연의 은총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인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인간의 할 일이 될 것이다. 농부의 노력이 있어야 자연의 은총이 결실을 맺는다. 자연의 은총만 기다려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첫째, 내가 농부의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의 은총이 작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성심성의껏 농사를 지었으나, 자연재해를 만나 경작한 것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는 경우도 있다.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있다. 그래서 삶은 알 수 없고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두 번째의 것이 우리 능력 밖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첫째의 조건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 아닐까. 그래서, 스피노자의 말처럼 내일 지구 멸망이 온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다.     


다시 듄으로 돌아가보면, 기적 아니고 훈련이다. 누군가의 눈에 기적처럼 보이는 그 일이 사실은 매일매일의 훈련에 있었다. 매일매일 농부의 삶에 있었다. 기적을 원한다면, 삶을 바꾸고 싶으면 오늘 지금 하는 나의 행동 하나를 바꾸어야 한다. 기적의 씨앗은 어디?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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