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그냥, 이번 생은 내 수많은 생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사실인지의 여부와 특정 종교를 믿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서 맘이, 편안해졌다.
이번 인생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집착, 성취를 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 경험해보고 싶은 것을 게걸스럽게 경험해보고 빠짐없이 두 눈에 담아야 한다는 욕망, 노후에는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 걱정, 지나간 시간과 동생의 삶에 대한 회한 등이.. 그 걱정과 고민들의 무게가, 너무나도 가벼워졌다.
이전에도 나는 수많은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수많은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의 삶은 그러한 수많은 삶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번 삶이 행복하든 불행하든, 돈이 많든 돈이 적든, 성취를 하든 성취를 하지 못하든, 원하는 것을 경험하든 하지 못하든. 그냥 모두 한낱 찰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저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마음상태가 충만하고, 안정적이고, 건강한지... 정도일 뿐이라는 것을.
그러자 복잡했던 삶이 너무나도 조용해졌다. 놓지 못해 두 손에 꽉 쥐고 있었던 삶의 가닥가닥들을 풀어주고 나니 남은 건 안정감과 고요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기로 했다. 이번 생이 내 수많은 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이전에도 나는 수많은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수많은 삶을 살거라고. 수많은 이전 삶 중에서 나는 매우 행복했을 수도, 핍박과 차별과 멸시를 받았을 수도, 많은 성취를 이루어내었지만 공허한 삶을 살았을 수도, 소박하지만 소박함 속에서 매일매일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삶을 살았을 수도, 부자였을 수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수도, 아름다웠을 수도, 외적으로 불만족스러워했을 수도, 건강했을수도, 매일 병마와 싸워야 했을 수도, 그리고 지금 삶도 그런 삶 중의 하나일 뿐일 수도.
그래도 뭐, 사실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반복되는 인생을 산다는 것이 어차피 떨어지게 될 큰 돌을 매일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운명같아서인지, 나에게 주어진 삶은 지금 하나로도 족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주어진 삶이 하나인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 번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속이라고 생각하면, 나에게 느껴졌던 삶의 무게들이 한없이 가볍게 다가오는 것 같은 해방감에, 이번 인생은 내 수많은 인생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