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오만과 대비되는 모모의 사랑
아이들의 운명은 언제나 기구하다. 아이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에 태어난다. 그리고 이 세계에 태어난 이상 별 수 없이 살아야만 한다.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건 어른들이지만, 그 안에서 본격적으로 생을 시작해야 하는 건 아이들이다.
이런 세상에 던져진 두 아이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 속 어린왕자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속 모모의 눈에 비친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까. 둘은 공통적으로 ‘관계맺기’와 ‘사랑’을 주요한 방법으로 꼽는다. 그러나 둘의 전략은 비슷해 보이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맺기 방식은 "길들이기"로도 표현되는, 아름다운 문학적 장면으로 회자되곤 한다. 그러나 아름답게만 보이는 어린왕자의 관계맺기 방식에는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관계맺기의 대상을 고르는 기준이다. 어린왕자는 “아무래도 어른들은 이상해”라고 말하며 자신과 대치되는 어른 집단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에 염증을 느낀다. 반면 자신이 사랑하는 장미와의 관계를 특별한 것으로 격상시킨다. 그렇다면 장미는 어린왕자의 기준에 부합하는 지혜를 가졌는가? 장미의 오만함과 허영심은 어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왕자는 장미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장미의 성품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왜 장미를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해가면서 맞춰주지만 다른 존재들에게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충분히 예쁘지 못해서?
어린왕자는 그가 만난 어른들이 어떤 이유로 현재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이유도 듣지 않은 채 바로 외면해버린다. 어쩌면 이들은 행성에서 외롭게 혼자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의지할 수 있는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사업가, 자신은 합리적이므로 응당 통치권을 가진다고 믿는 왕, 남들의 숭배에 매달리는 허영쟁이, 그리고 고고하게 학문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진 지리학자 모두 말이다. 실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기 위해 그런 것 하나쯤은 있다. 자신과 장미와의 우월한 관계에 심취해 다른 꽃들을 천대하는 어린왕자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자의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며, 예쁜 장미를 닮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들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어린왕자의 태도는 오만과 아집 그뿐이다.
아름다움의 전형인 장미꽃을 사랑한 어린왕자와는 달리, 『자기 앞의 생』의 어린이 주인공 모모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어린왕자가 보면 한숨 쉬며 “역시 여긴 나와 안 맞아”라고 생각하게 만들, 인간사회의 온갖 추한 꼬락서니들을 모모는 모두 보고 듣고 겪지만 그 세계를 따뜻한 호기심의 눈으로 맞이한다. 어린왕자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지만, 모모는 알고 있다. “자신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절대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생전에 아무리 아름다웠어도 결국 자연의 법칙에 무릎 꿇어 고통스럽게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또한 인간 삶은 늘 모순과 추태들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걸 모두 떠안고도 자신의 생을 어떻게 일궈나가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의 몫이라는 것을 말이다.
먼지로 뒤범벅이 되지 않고서는 청소를 할 수 없다고 했던가. 포기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인생은 지름길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모모가 자신의 생에 대해 털어놓을 때 나딘이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귀를 막는 것을 보고 모모는 “그런 모습이 좀 우스웠다.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세상에 이런 인생이 있을까 싶은, 기가 막히는 인생이 바로 자신의 것이어도 어쨌든 자신이 살아내야 할 생이다. 귀를 막는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보기 싫다고 그저 눈만 가리면 그만인가. 모모는 생의 앞에서 뒷걸음치기를 거부하고 정면으로 맞선다. 어린왕자라면 시궁창 같은 행성을 떠나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말이다. 구역질 나는 삶의 순간에서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영혼을 열심히 청소하는 모모가, 늘 자신의 행성을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질 수 없도록 깨끗하게 유지하던 어린왕자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이다.
모모는 치열하게 고민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미래에 무얼 할지, 주변인들의 생을 보며 끊임없이 생각을 확장시켜나간다. 생에 의해 파괴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하고, ‘늙은 창녀들만 맡아 좋은 포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이렇게 모모에게서 나오는 생각들을 관찰하다 보면, 어린왕자와는 달리 모모의 사고방식에는 분명한 기준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생을 살아내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경과 연민, 그리고 사랑이다.
모모도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회의 경계인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분노한다. 이는 단적으로 안락사에 대한 모모의 생각에서 잘 드러난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처럼 생의 무차별 공격을 받아야만 했던 사람에게 사회가 안락사마저 허용하지 않는 것을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다.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옮겨 적절한 치료를 받도록 권하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모모는 마치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그 잘난 ‘치료’ 따위는 믿지 않는다는 듯한 냉소를 보낸다. 사회가 제공하는 치료는 한 번도 진짜 치료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다 겪어온 로자 아줌마가 그나마 생을 마칠 때만이라도 고통 없이 마칠 수 있도록 하는 안락사는 법에 의해 중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사회가 그동안 로자와 같은 이들의 생을 무참히 밟아버린 일은 중벌의 대상이 아니라니,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집에 격리시켜놓고 가짜 정체성을 만들어야만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평생에 걸쳐 없는 듯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가게 하다가 이제는 끝끝내 그 생을 연장시켜줄테니 식물로 살아가라는 사회의 주문에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응해야 했던 것일까. 사회의 명령을 거역하고 로자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한 모모를 ‘야만적’이라고 부른 사람들의 말을 따른다면, 정녕 그게 야만이었다면, 대체 ‘문명’은 무엇인가. 사회는 누구를 위해 작동하며 법은 누구를 보호하고 있었는가. 이 안락사 에피소드는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할 ‘제도’가 오히려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제도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모모가 “자연의 법칙에는 동정심이란 게 없다”고 하듯, 생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이토록 가차 없이 잔인하다. 그렇다면 생에 치이고 고통받는 인간들을 위로해줄 방편은 무엇인가? 바로 사랑이다. 생이 우리의 엉덩이를 세차게 걷어차버려도, 사랑은 그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 로자도 일평생 사회로부터 모질게 당했지만 결국 끝까지 곁에 있어주었던 모모의 사랑에 행복해하면서 생을 마감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의 사랑으로는 ‘살만한 생’을 만들기에 역부족이다. 사회 전체가 생을 공격해대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렇다. 수없이 많은 영역에서 인간들은 공격받는다. 아직도 권력의 논리, 자본의 논리, 국가의 논리, 숫자와 효율의 논리에 의해 인간은 늘 목적 아닌 수단으로 전락한다. 누군가에겐 이것이 소설 속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 이것은 실제 자기 앞에 놓인 생이다. “사람들은 모두 자연의 법칙을 지켜야 한다고들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자연 속의 예비 부속품들인 인간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모모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 전체가 되새겨야 하는 이유다.
앞에서 사회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실컷 비판해놨지만, 그전에 나 자신부터 돌아보는 게 옳은 수순이다. 나는 과연 누군가의 생을 사랑으로 위로해준 적이 있었을까. 과거의 내가 조금 더 다가가 사랑했더라면 아마 덜어낼 수 있었을 가족들의 생의 무게와, 아끼던 친구들의 마음의 짐을 떠올리며, 사랑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동안 내 생만을 돌보느라, 혹은 내가 치를 희생이 두려워서 사랑이라는 인간의 특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음을 느낀다. 그리고 늘 내가 겪는 고통을 남들보다 배로 부풀려 생각했던 내 철없음도 돌이켜본다. 열네 살 모모보다 못나도 한참은 못난 나임을 깨닫게 된다.
어린왕자는 생각보다 정말 어렸고, 모모는 생각보다 정말 성숙해서 닮기가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