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가 그려내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몇 년 전 할머니를 뵀던 기억이 난다. 몰라보게 핼쑥해지신 모습이었다. 한동안 조금 편찮으셨는데, 할머니께서 사시는 지방의 작은 병원 의사가 할머니께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드리며 무조건 입원하셔야 한다고 말했단다. 의사의 설명을 알아들으실 리 없는 할머니는 결국 의사의 말에 따라 두 번이나 입원을 하시고 거액을 지불하셨다. 상태가 나아지시기는커녕, 그 입원생활이 답답하고 힘드셔서 기력을 잃으셨다.
그런데 서울에 있는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의사는 입원할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왜 하셨냐고 말했다. 덧붙여, 지방의 병원들이 종종 이렇게 자식과 따로 사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불필요한 입원을 시키는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경우가 많다고도 알려주었다. 사실 지방의 어르신들은 의사의 말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다. 몇몇 의사들은 이렇듯 전문성을 무기로 세상 물정 모르는 지방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나는 몹시 화가 났다. 그러고 얼마 후에 읽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는 내게 꽤나 익숙한 이야기였다.
나는 책 속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우스꽝스러운 프랑스 지방민들의 생활을 보며 편히 웃을 수가 없었다. 이런 시골에 사는 주인공 엠마 보바리가 품는 시골생활에 대한 반항심과 도시의 삶에 대한 동경은 후대에 '보바리즘(Bovarism: 현실에 대한 불만족, 헛된 야망, 상상으로의 도피)'이라고도 불리며 일종의 정신병으로까지 치부되지만, 나는 엠마를 단순히 정신이상으로 인해 파국을 맞은 인물로만 생각할 수 없었다. 열악한 시골 환경 속에서 그녀가 느꼈을 공허감을 짐작할 수 있었고,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까지의 그녀의 고통에 연민을 느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엠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엠마의 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처한 지방이라는 환경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 글에서는 엠마를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가 아닌, 19세기 프랑스의 시골 환경 속에 놓인 한 여성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제대로 이해해보려 한다.
이 소설이 그려내는 지방에서의 삶은 ‘생활유지’와 ‘자기보존’으로 요약된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권태로운 전원뿐이고, 들리는 소리는 가축 울음소리가 전부이다. 이들에게 유일한 관심사란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밖에 없으며, 교양·예절·도리와 같은 관념들은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변변한 교육도 제공되지 않고, 속물주의에 찌든 천박한 대화들이 오가며, 인간의 적나라한 욕망이 아무런 여과 없이 펼쳐진다. 특히 엠마와 샤를의 결혼식 장면에서 이 지방민들이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모습은 “콧구멍까지 귀리로 포식한 말들”이라는 표현으로 제대로 묘사된다.
그나마 이들의 단조로운 삶 속에서 두드러지는 영역이 하나 있다면 바로 종교이다. 하지만 종교 역시 사람들에게 자아의 충만함을 가져다주기보다는 맹목적인 추종의 대상이 될 뿐이다. 사람들은 종교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종교에 의탁한다. 이들은 “마땅히 의사나 약사를 찾아와야 할 경우에도 여전히 구일 기도나 성유물이나 신부에게 의지”하고 있다. 엠마는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기 위해 자칭 “영혼의 의사”인 신부와 만나는데, 신부는 그저 “몸이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조언해준다. 영혼을 관장한다는 교회에서조차 물질적 안락과 안위가 최고의 덕목이었던 셈이다. 마치 학생이 진로상담을 받는데 “넌 그냥 밥이나 잘 챙겨 먹으렴”이라고 조언받는 격이다.
한 마디로, 이곳을 지배하는 논리는 생존과 쾌락뿐이다. 바로 이런 곳이었기에 영악한 부르주아들이 지방에서 손쉽게 득세할 수 있었다. 서민들은 부르주아들의 교묘한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사기꾼을 견제하는 법도, 사치를 절제하는 법도 모른다. 이렇게 착취당하는 지방민들을 구제해줄 기관은 마을 어디에도 없었다. 엠마는 그런 환경에서 나온 희생자였다.
엠마는 지방의 돌연변이였다. 그녀는 단순 생계유지 이외에도 삶에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녀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이런 세계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문학은 엠마에게 “고귀한 성격, 순수한 애정, 행복의 정경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면서, 일상에서 망각하는 미학적인 영역들을 인식하게 해 주었다. 즉, 독서는 엠마에게 무엇이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만드는지 알려준 것이다. 엠마는 배불리 먹고사는 데 만족하지 않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특별함을 갖춘 인물이었다.
엠마에게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온 것은 문학 속 펼쳐지는 이야기와 자신의 실제 삶이 극단적으로 대비되었다는 점이다. 만약 문학이 보여준 세계와 실제 생활이 어느 정도 유사했다면, 그녀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망상인지 구별하는 판단력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처한 환경은 처참했다.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말이 통한다고 느낀 몇몇 인물들은 그녀를 이용하기만 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과 현실의 간극을 해소할 수 있는 건전한 방법에 대해 교육받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로돌프와 레옹같은 인물들이 제공하는 불륜이라는 왜곡된 사랑이, 혹은 뢰르가 제공하는 사치품들이, 자신이 이제껏 갈망해온 어떤 것들이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사치와 허영의 대명사' 마담 보바리는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엠마처럼 섬세한 사람에게는 조그마한 내면의 결핍도 심연의 골짜기로 느껴진다. 남들이 느끼지 않는 마음의 결핍을 직시하는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섬세하다는 건 어떤 환경에서는 축복이 되었겠지만, 그녀가 처한 지방이라는 환경에서는 독이 되었다.
인생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만일 그녀에게 적절한 교육과 환경이 뒷받침되었더라면, 섬세한 감정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멋진 예술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아름다운 노랫말을 읊는 음유시인이, 불완전한 자아를 연기하는 배우가, 가슴 아픈 서정시를 쓰는 작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엠마는 플로베르가 될 수도 있었다. 플로베르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엠마였다. 플로베르 역시 지독한 낭만주의자였으나, 그는 남성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던 시대에 남자로 태어났고, 적절한 고등 교육을 받아 자신 안의 엠마를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계 대문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같은 엠마지만, 전혀 다른 결말이다. 그래서 플로베르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야 (Madame Bovary, c'est moi)
엠마 보바리는 우리 모두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품는 마음속의 공허, 채우고자 하는 욕망, 느끼고 싶은 설렘, 발견하고 싶은 인생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이런 것들을 충족해주지 못하는 환경에서 엠마가 자살을 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인간다움을 보존해주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통을 느끼는 엠마를 보며 그 안에서 나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5년 전 어느 무더운 여름날, 길거리에서 당한 성추행에 대해 경찰서에 신고하러 갔을 때 한 경찰관은 이렇게 말했다. 반팔 반바지를 왜 입었냐, 원래 남자들은 그런 욕구가 있으니까 개인이 조심해야 한다. 심지어는, 요새 하도 거짓으로 신고해서 돈 뜯어내려는 꽃뱀들이 많다는 말까지. 결국 범인은 처벌받았지만, 그 당시 경찰서에 간 것을 후회했다. 피해를 입증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나도 비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것이 자신의 고통을 교회라는 구제기관에 호소했지만 되려 자신의 인간다움을 잃게 되기만 한 엠마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미국 가톨릭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고발하는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했다면, 그 아이를 강간하는 데에도 마을 전체가 필요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역시나 엠마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데에도 마을 전체가 필요했다. 지방민들의 낮은 인식 수준, 피해자 구제 수단의 부재, 교회의 무능, 규율과 제도의 결여, 지배계급의 타락까지. 플로베르가 이렇게 환경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며 많은 힌트를 던졌는데도 우리가 그저 엠마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앞으로 제 2의 엠마, 제 3의 엠마는 지속적으로 양산될 것이다.
마담 보바리는 곧 경찰서에서 고통받아야 했던 나였고,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이용당했던 우리 할머니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나와 내 가족이 속한 세계는 이런 위험에 덜 노출된 세계일 것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세상에는 실상 얼마나 많은 엠마들이 있을지 무서워진다. 경찰서 소동으로 내가 겪은 정신적 고통은, 어쩌면 다른 곳에서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떤 곳에서는 ‘진짜’ 소동의 결말이… 엠마처럼 자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엠마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나 역시 어떤 순간에는 엠마였지만, 나도 모르게 어떤 순간들에서는 간접적인 가해자 뢰르이기도, 오메이기도 했을 것이다. 내가 빛을 비춰주지 못한 이름 모를 엠마들을 위해 언제나 반성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