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일을 열번반복하면 작심삼십일이 된다
눈이 끝도 없이 내린다.
오늘 같은 날, 관람객이 이 시골까지 찾아올 리 없겠지만 일단 삽을 들고 나가 눈을 치우고 길을 낸다. 주차장 앞, 골목길은 눈을 쓸어도 바닥이 꽁꽁 얼기에 동네 어르신들이 넘어질까 눈이 오는 날이면 염화칼슘을 뿌린다.
오늘도 봉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는데,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서 느닷없이 역정이다. 염화칼슘 때문에 아스팔트가 상하니 그만 좀 뿌리란다.
아니, 내가 염화칼슘을 포대로 들이붓는 것도 아니고, 살살 뿌리는데 이 정도 양에 아스팔트가 상하면 얼마나 상한다고....
게다가 자기 집 앞도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사람이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한 거 아닌가?
염화칼슘을 뿌려 위험한 빙판길을 방지하고자 한 일이 아스팔트를 상하게 한다고 화를 낼 일인가. 진짜 이해할 수가 없다.
아침부터 종종거리며 눈을 쓸고, 길을 내고, 염화칼슘을 퍼 날라 뿌리고... 혼자 애를 쓰고 있는데, 싫은 소리를 들으니 나도 기분이 팍 상한다. 할 말은 많지만 언쟁하기도 싫어서 그냥 대충 눈을 치우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아침부터 진짜 기운이 쏙 빠진다.
군대에 가면 겨울에 내리는 눈이 하얀 쓰레기로 보인다더니... 치우기가 무섭게 돌아서면 쌓여있는 눈이 징글징글하다. 꽝꽝 언 손과 더 꽝꽝 언 마음을 녹이려고 탕비실에 가서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런데, 눈앞에 정수기 옆, 손님용으로 비치해 둔 맥심이 들어온다.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고 동공이 흔들린다.
눈은 끝도 없이 내리지, 날은 춥지, 기분도 더럽게 우울하지... 이런 날, 이런 순간이야말로 저 달달하고 뜨끈한 커피믹스 한 잔보다 적절한 위로가 있을까? 딱 한 잔인데... 오늘만은 괜찮지 않을까?
죄 없는 커피믹스를 한참을 노려보며 붙박이처럼 서 있다. 그러다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뒤돌아서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오십일, 처음 병원에 다녀온 지 이제 겨우 오십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하루 2천 보도 겨우 움직이지 않았던 수많은 날, 퇴근하면 침대와 한 몸이 되기 바빴던 게으른 몸뚱이.... 튀기고, 기름지고, 달고, 차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들을 마구잡이로 몸에 들이붓던 몹쓸 식습관...
과거의 생활을 복기하며, 무수히 후회하고 제발 자궁 적출만 아니어라.... 간절히 바랐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는 건강하고 부지런한 몸뚱이로 살겠다고 절제하고 자제하겠다고 수없이 다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겨우 오십일만에 이렇게 흔들리다니.... 다시 예전의 삶으로.... 하루 종일 이 커피, 저 커피를 입에 달고 있던 시절로 돌아가려 하다니....
아무리 관성의 법칙이 무섭다지만, 이 어리석은 휴먼이여!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내가 이렇게 늘어날 대로 늘어난 팬티 고무줄처럼 느슨해지다 못해, 톡 끊어질 위기에 처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결과를 피했기 때문이다.
지난번 방문한 서울 산부인과 MRI 촬영 결과, 다행히 자궁 적출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개복수술을 피할 수는 없게 됐지만, 그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감사했다. 같이 마음고생하던 가족들도 한시름 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마음도 한없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멀리하던 라면도 다시 먹고, 가끔 얼음이 든 음료도 마셨다. 명절에는 식욕이 폭발해서, 저녁 8시 이후 금식하던 습관도 단박에 무너졌다. 그러다가 음료를 주문해야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디카페인 아.이.스. 카페라테를 시킬까 말까 고민하는 거다.
세상에! 한시름 겨우 돌렸을 뿐인데, 내 자궁 속 수많은 근종의 원흉일 커.피! 그것도 아이스 커피를?
사람 마음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엄마도 이제 꾸지뽕 물을 나보고 달여 먹으란다.
이번이 겨우 세 번째였다.
엄마도 나이가 있고, 몸이 피곤하니 그런 소리가 나왔겠지만, 원룸에 사는 나는 인덕션에 몇 시간이고 물을 달일 수가 없다. 게다가 딸이 아프다는데, 겨우 세 번째에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나 섭섭하고 화가 났다.
최근 생리 마지막쯤에는 하혈이 다시 시작됐었다. 내가 처음 세운 가설대로, 양쪽 난소 중 한쪽이 근종과 유착이 돼 있는지 격 달로 하혈하는 거였다.
그럼 그렇지, 겨우 한 달 신경을 쓴다고 몸이 180도 좋아질 리 없는 거였다. 하혈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지겹게도 이어졌다. 다만, 첫 하혈처럼 수시로 엄청난 양이 쏟아내지는 않았다. 그나마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거겠지.
처음, 하혈을 하고 혹시나 죽을병이 아닐까 전전긍긍할 때는 건강이 최대 관심사였고 건강만 되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멀리하던 글쓰기도 매일매일 열심히 할 것을 다짐했었다. 그런데, 위기에서 조금 벗어나자 금세 나태해졌다.
건강 걱정에서 슬쩍 비켜 난 마음에 예전처럼 삶에 대한 온갖 불평불만과 인간에 대한 회의감과 미움이 다시 들어차기 시작했다.
사실, 내 자궁근종에는 아이스 커피와 도통 움직이지 않는 습관, 절제를 모르는 식탐과 음식 남용도 있지만, 내 ‘마음 상태’도 크게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하혈이 극심하던 그때에 나는 그 몇 달 전부터 삶과 인간에 대한 총체적 회의를 가졌고, 사업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시달린 탓에 사람을 극도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었다.
그 스트레스가 최악의 몸 상태를 불러왔을 것이다.
내내 달고 있던 자궁근종이 급격히 커진 것도, 느닷없이 엄청난 하혈이 쏟아낸 것도 아마 그 탓일 거다.
용서와 감사하는 마음, 긍정의 힘은 남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들이 가장 먼저 나에게 좋고, 나를 살게 하기에 하라는 거다.
아는데.... 그게 또 그렇게 어렵다.
한때 청년팀 팀장까지 맡으며 문턱이 닳도록 열과 성을 다해 교회를 다녔던 나는, 오늘도 사무실에 앉아 조용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웅얼거려본다.
내가 그만 내리라고 아무리 빌어도 그칠 리 없는 눈과, 논쟁을 한다고 결코 달라질 리 없는 사람들과,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더 이상, 열 내지 말지어다.
무엇보다 내 정신과 신체 건강을 위해서라도 감사를 떠올려 보기로 한다.
그리고 괜히 시끄러운 생각들로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말고, 글이나 열심히 쓰자!
뿌옇게 흐려진 하늘을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