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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럭저럭 소소 Oct 30. 2020

파킨슨씨, 안녕하세요?

“어머니가 응급실에 가셨다가 지금 퇴원하셨어. 당신도 알고 있으라고. 내려온다고 당신이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 같아.” 남편과 전화통화를 끝낸 즉시 그 내용은 마음속에 ‘중요사항’으로 저 정 되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경주 촌집에 모여 하룻밤 지내다가 받은 전갈이었다. 방금 인생사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만한 일을 전달받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시간을 두고 겨뤄야 될 문제라고 느꼈고, 일단 친구들과 모임을 마무리하고 생각하자 판단했다.

친구들을 보내고 남편과 다시 전화 연결. 어제 동네 아주머니의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내려가니 어머니가 응급실에 가자고 하셨단다. 기력이 하도 없어 대체 죽을병인가 싶어 갔다는 것이다. MRI, 초음파 등등 사진 찍고 진단받고 응급실로 들어온 비용으로 순식간에 50만 원이 날아갔단다. 파킨슨 병 초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거슬러 생각해보니 그 병의 전조현상이 하나씩 새록새록 떠올랐다. 노인성 변비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괄약근이 약해지면서 생긴 증상이었고, 노인이라 행동이 느리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근육의 수축이완작용이 마비되는 데서 오는 증상이었다. 노인이라 말이 느리고 밥을 조금 드신다고 생각했던 것이 혀의 근육과 소화기관의 근육의 마비와 연동되어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마따나 내가 내려간다고 뭘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 꼭 뭘 해줄 수 있을 때만 만나나? 나는 어머니를 찾아온 그 파킨슨씨를 똑바로 보고 싶었다.

그동안 못 뵌 사이 어머니는 현격히 사이즈가 줄어 내가 안으니 품에 쏙 들어왔다. “니는 하나도 안 변하고 여전하네.” 저음의 중얼거림 같은 그 말 뒤에 따라 나오지 못한 말 ‘그런데 나는 왜 이런 내가 됐을까.’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며느리 밥걱정을 하셨다. 근처에 사는 동서가 생업으로 발바닥에 불이 나면서도 틈틈이 ‘최선을 다해’ 시댁을 드나들며 그동안 어머니를 보살폈다. 남편은 그런 제수씨한테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르고. 돈 드는 일이 우리 차지라고 해서 동서의 그 구체적인 수고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동서의 이야기를 들으니 어머니는 이제 자력으로는 변을 볼 수 없어서 동서가 관장을 시켜드린다고 했다. 재래식 주택이라 화장실이 밖에 있어 환자용 변기를 방에 들여놓자고 간곡히 권했지만 어머니는 방에 ‘그런 거’를 둘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는 것이다. 동서는 그런 어머니께 “남의 눈이 뭐가 중요하냐, 내가 살고 볼 일”이라며 ‘열이 받쳐 한 소리’했다고 했다. 동서가 채워놓은 냉장고 속 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렸다. 시집와 내가 뵌 어머니는 밥을 정말 맛있게 드시던 분이셨다. 그런 어머니가 정말 입맛을 잃어버렸는지 밥알을 하나씩 세며 겨우 반 공기를 비우셨다. 사태가 심각했다. 내가 내려가 한 일라곤 이마트에 가서 앞으로 사다 써야 할 생필품 일체를 구비해 놓은 것밖에 없다.

경주에서 친구들을 만나고 부산에서 어머니를 뵙고 온 2박 3일의 여정이 꿈같았다. 파킨슨 씨를 맞은 우리 가족은 전과 다른 오와 열을 구축하기 위해 서로 분주했다. 마침 마산 방면 현장으로 발령을 받은 남편은 주말이면 어머니께 간다. 나는? 생각이 분분하다. 일을 정리하고 어머니를 모셔야 하나. 예전에 어머니께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했다. 주변 노인분들이 요양원에 보내졌다는 말을 하시던 어머니께 “어머니 노후는 걱정 마세요. 제가 끝까지 따뜻하게 안고 보내드릴게요.” 나는 그 약속을 지킬 때가 왔나 싶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경주 촌집을 대충 뜯어고쳐서 거기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 어떨까, 머릿속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 집을 짓고 허물었다. 책을 읽는데 같은 페이지를 계속 읽고 있는 나를 본다. 딸들과 예비 사위가 부산에 내려가 할머니를 뵙고 온다며 내려갔다. 큰딸은 할머니 댁에 전자레인지가 고장 난 걸 보고 새로 사드리고 왔다고 했다. 작은딸은 다녀오더니 할머니가 마침 찾아온 동네 친구분께 “주영이가 왔다.”면서 보고 가라고 붙잡더라는 것이다.

어머니 바로 아래 시이모님도 어머님과 같은 병이다. 남편이 시이모님께 전화했더니 어머님한테 “그 병이 원래 그런 병인데 언니처럼 누워있고 밖에도 안 나가면 점점 입맛 잃고 빨리 죽는다. 파킨슨이 왔으면 왔지 나는 손주들 키워주고 할 일 다 한다. 손 좀 떨리면 어떠노. 언니도 경로당도 가고 자꾸 움직여야 된다.” 고 말씀하셨단다. 동병상련. 아픈 사람한테 먼저 아픈 사람이 사는 법이야말로 살아있는 법문이 아닌가. 그날 저녁 어머님께 전화하니 한결 목소리에 힘이 있더라고 남편이 말했다. 시이모님은 젊은 시절부터 불법에 입문하셨다. 그런 이모님께 파킨슨 씨가 찾아왔을 때 누구는 그랬다. “부처 믿어도 소용없네.” 정말 그런가? 나는 이모님이 파킨슨씨를 데리고 씩씩하게 살고 있는 지금 이 모습이 부처 믿은 공덕이라고 생각한다. 불법 믿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자칫 오해한다. 병 없는 완전한 건강체를 바라면서 그런 기대에 어긋나면 부처를 버린다. 신심이 얕기가 살얼음 같다.

돈으로 생로병사를 좌지우지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죄다. 현대 과학과 결합한 자본주의는 그런 면에서 오만과 망상 덩어리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돈은 생로병사의 길을 가로질러가는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든다. 어제 어떤 분을 만났더니 병들었을 때를 대비해 간병보험은 꼭 들어놓으라고 했다. 선택의 문제다. 다만 우리는 간병보험 들 돈을 버는 동안 가족과 친구와 함께 하는 따뜻하고 동그란 시간들은 죄다 놓치거나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아닌가. 불자들은 서로에게 성불하세요, 해탈하세요, 라며 축원한다. 해탈이란 병과 가난 없는 삶이 아니라 무엇을 건강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부자라고 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를 바로 잡는 것부터 시작된다. 현존을 결핍으로 낙인찍으며 더 나은 존재를 꿈꾸는 정신구조를 통찰하는 것이 해탈의 시작이다. 알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부질없는 논쟁은 피하자. 나는 파킨슨씨한테 웃으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파킨슨 씨! 기왕 오셨으니 우리 함께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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