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비 Jan 22. 2024

엄마

내 인생의 한 마디

요즘 엄마랑 거의 매일 통화를 한다. 사실, 스무 살 초반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서 엄마를 많이 봐야 두어 달에 한 번, 통화도 간간히 그렇게 이어지다 미국으로 오면서는 그마저도 간격이 더 벌어졌다. 몇 년에 한 번 한국 방문, 통화는 몇 달에 한 번씩 할 때도 있었다.


한결같은 애닳음으로 딸을 걱정하던 엄마, 살림은 영 꽝이라 실질적인 알뜰살뜰 도움은 되지 않는 어설픈 엄마, 평생 한 일이 시장 점포에서 장사하신 일이라 집과 점포 공간을 빼면 버스도 전철도 혼자서 못 타는 엄마, 그래도 그 점포로 사기, 부도, 공장을 빚투성이로 넘기기까지 사업의 롤러코스터를 타신 아버지와 집안을 건사하고 우리를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보내고, 무능한 오빠네를 최대한 지원하며, 10년 전 뇌출혈로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께서 작년 암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수발을 들며 평생을 살아왔다. 정말 한평생 동안 엄마를 마음고생 몸 고생시킨, 부인복 최고인 우리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작년 여름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에 급히 두 주 간 한국을 다녀온 후부터 엄마랑 이제 거의 매일 전화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갑자기 친구가 되었다. 서로가 개략적으로 알았던 사정과 이야기를 한참에 걸쳐 낱낱이 풀어냈다. 각자의 삶이 얼마나 치열하고 징글징글하고 서럽고 힘들었는지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또 하였고 듣고 또 들었다. 엄마라서일까, 딸이라서일까. 그 하소연과 넋두리는 지겹지 않았고 ‘그래 그래’ 맞장구치며 한숨 쉬며 느슨하게 이어져있던 끈을 다시 단단히 이어갔다. 나는 엄마가 매일 뭘 먹었는지, 장사는 잘 되었는지, 병원은 어딜 갔는지 똑같은 일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미국이라는 거리만큼이나 딸이 어떻게 사는지 어렴풋하게 알던 엄마에게 새롭게 매일의 미국 시골 일상도 들려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롯이 둘이 있었던 두 주라는 시간은 30년 세월을 다시 엮기에 충분했다. 이제 둘은 날마다 지구 반대편에서 서로의 아침과 밤에 전화를 붙잡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낄낄거리고 박장대소하며 사랑한다는 말로 통화를 마친다.


환갑을 향해가는 딸과 팔순이 된 엄마는 인생의 친구라는 모습으로 새롭게 관계를 이어간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괜찮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이면서, 각자의 일상에서 저지르는 실수도 자책도 기쁨도 즐거움도 모두 나누며 풀어낸다. 내 인생의 시작이었으며 그 모든 마디와 고비를 다 알고 지지하며 사랑해 온 사람. 언제나 내 언덕이던 엄마는 이제 같이 인생을 걸어가는 길동무가 되었다. 앞으로 이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손잡고 잘 걸어가고 싶다. 같이 하늘도 보고 꽃도 보고 돌부리에 넘어지면 괜찮다고 일으켜 주며 가끔은 그냥 쉬기도 하며 두런두런 길을 가고 싶다.


쉽지 않았던 인생에 엄마가 내 엄마라서 나는 참 복 받았다. 8년의 죽을 것 같았던 첫 결혼 생활을 끝내고 엄마에게 전화 걸었던 날 아침, “헤어졌고 정리했다고” 긴 세월을 묵힌 말을 꺼냈을 때 잠시의 영원 같았던 침묵이 흐른 후 엄마는 말했다.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그동안 너 사는 것 보며 말은 못 했지만 엄마 뼈 속까지 시리도록 아팠다고. 앞으로 반듯하게 살면 된다고.” 그때 엄마의 그 말이 내 인생의 한 마디가 되었다. 엄마는 왜 그랬냐고 묻지도, 울지도, 주변 시선과 걱정도 내비치지도 않고 오롯이 딸을 끌어안았다. 엄마랑 나중에 그날을 얘기해 보니, 엄마는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 순간 하늘과 땅이 맞붙어 세상이 까매졌었다고.  


그 주말 혼자서는 못 오는 길을 남동생을 앞세워 내가 자리 잡은 곳으로 왔다. 며칠 밤을 새워했을 온갖 밑반찬과 음식을 잔뜩 싸들고서. 방을 살펴보고 변변한 이불이 없음을 보고는 바로 내 손을 붙잡고 근처 백화점에 가서 평소라면 절대 사지 않을 비싼 이불과 살림살이를 마련해 주었다. 엄마는 딸의 감당 못할 실패에도 인생의 바닥 같은 순간에도 변함없이 나를 감싸 안았다.


8년 동안의 터널 속에서 나는 칠흑 같은 어둠처럼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절벽을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결국 이혼을 선택했고 내 인생을 다시 선언했다. 나는 귀한 존재라고 내 인생은 지금 받는 취급보다는 더 소중하다고 저 가슴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은 그때도 어렴풋하게나마 알았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내는 소리라고. 엄마의 귀한 딸이 이리 살 수는 없다고… 나는 다시 살아냈고 인생은 흐르고 흘러 이제 여기 미국 시골에서 특별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 남들은 평범하게 누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남편, 아들, 딸.. 나는 내 온 인생을 걸고 그 평범함을 누리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미지의 땅으로 왔다.


나는 엄마의 한결같은 사랑과 그 한 마디로 살아냈고 날마다 다시 일어났다. 비바람이 어찌 없었을까. 휘잉휘잉 부는 절절한 외로움과 서러움의 순간이 어찌 적었을까. 이방인의 삶이 그리 녹록했을까. 하지만... 엄마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다시 내 인생을 새롭게 써 내려갈 수 있었을지. 엄마가 아니면 묵묵히 날마다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을지. 엄마가 아니면 하나님을 그리 절절히 만날 수 있었을지. 엄마가 아니면 오늘 이 잔잔한 행복이 있었을지. 엄마는 내 존재의 근원이자 변함없는 언덕이자 휴식처이다.


내 인생의 한 사람.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름.
엄마.
엄마, 정말 정말 사랑해.

엄마가 내 엄마라서 너무 고마워.

엄마는 내 인생의 로또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