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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Jul 02. 2024

아들의 공책

과거의 너를 만나다

집에 애들 공책이 가득하다. 초등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공책을 사다 보니 채 반도 쓰지 않은 공책이 수두룩한데, 그냥 버리기 아까워 모아두다가 작년부터 내가 쓰기 시작했다. 나이 탓인지, 쓸데없는 폰 사용이 늘어서인지 언젠가부터 확실하게 집중력이 떨어진다. 매일 아침 읽는 영어 성경도 자꾸 같은 구절만 읽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일쑤여서 적으면서 읽기로 다짐하고, 굴러다니는 아이들 연필과 공책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마주친 아들 녀석 공책의 한 모퉁이.

공책 모서리마다 저렇게 그려놓던 시절이 있었다. 아들 본인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잠깐의 습관이었는데, 대학생이 된 아들에게 보여주니 한참을 웃는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엿보는 저 녀석 때문에 즐겁다.

뜻밖의 기쁨처럼, 아이들이 써 놓은 글과 낙서와 그림을 문득문득 만나는 재미가 있다.


그러다 그저께는,

아들 한글학교 시절에 받아쓰기 시험 친 페이지를 만났다. 미국에서 태어난 Korean American으로 초등학교 때 엄마의 손에 이끌려 다닌 한글학교의 흔적이다. 영어가 편한 아이지만, 부모의 언어인 한글을 배워야 했던 아이의 과거가 영어를 늘리고자 하는 엄마의 현재와 만났다.

이 공책 덕분에

현재의 나는 과거의 아들과 연결되고,

이민 1세대인 나의 영어를 향한 노력과

이민 2세대인 아들의 한글을 향한 노력이 만났다.


그 서로의 노력은

오랜 시간 동안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

때로 상대방의 언어로 더듬거리면서 서로를 이해시키려 애쓰는 대화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모국어로 섬세한 촉수처럼 속속 깊이 어루만질 수 없는 아쉬움을 낳기도 하고,

그래서 말보다는 진한 허그와 웃음과 따뜻한 밥으로 대신하기도 하면서,

어느 날은 더 멀어졌다가 어느 날은 더 가까워지는,

저마다 다르지만 또 비슷한 여느 이민 가정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언젠가 언어의 장벽이 완전히 없어지는 시대가 오면 아이들에게 말로 온전히 다다르지 못한 내 마음의 글이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어서...

과거의 너를 오늘 내가 만났듯이 언젠가 미래의 네게 오늘의 내가 닿기를 바라본다.)


#이민자_가정_단면

#한국말_공로자는_한글학교가_아니라_K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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