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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비 Mar 21. 2024

불빛과 별빛

확장과 회귀

몇 년 전 코비드 팬데믹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침내 모두에게 공급된 백신으로 장착하고 우리 식구는 동부의 주요 도시를 훑는 2주간의 긴 road trip을 다녀왔다. 원체 꼼꼼하고 계획적인 남편은 두 주간의 일정을 다 짜고 식구 앞에서 프레젠테이션까지 할 만큼 만반의 준비를 기했고, 나는 낯선 곳에서 2주간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보낼 4명의 육체적 정신적 피로감이 걱정되었고, 아들은 심드렁으로, 딸은 온갖 옷을 준비하는 들뜸으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아이들에게 출발 전 몇 번이고 당부했다. 함께 두 주간이나 집을 떠나 낯선 곳을 계속 다니려면 많이 힘들 테니 서로 짜증 내지 말고 마음 상하지 말고 되도록 즐겁게 다니자고.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여행은 필라델피아, 나이아가라 폭포, 뉴욕, 보스턴을 지나 마지막으로 미국 동부 맨 꼭대기인 메인 주에 있는 아카디아 국립공원(Acadia National Park)에서 종점을 찍고 다시 내려왔다.


여행은 우려와는 달리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모든 도시는 각각의 특색으로 좋았고 모든 자연도 각각의 모양으로 좋았다. 어느새 훌쩍 자라 단단해진 두 틴에이저 아이들은 별 불평 없이 오히려 알아서 맛집을 찾아내기도 하고 큰 아들은 운전까지 나누어하며 여행의 재미와 편리를 더했다. 산도 바다도 폭포도, 대도시의 건물도, 거리도, 야경도, 고적한 공원도, 역사적 공간도, 뜻밖의 감동을 준 아트 뮤지엄도, 줄곧 달린 고속도로도, 마지막 메인 주의 밤하늘까지도 우린 하나하나 감탄하고 감동하며 즐거워했다.


굳이 메인 주까지 간 데는 이유가 있다. 문명의 불빛이 없는 곳에서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를 보는 것이 내 인생 유일한 버킷 리스트.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남편이 마지막으로 잡은 코스인 아카디아 국립공원은 stargazing으로 미국 전체에서 유명한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결국 마침내 본 그 밤하늘은 지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되는 장관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식구들에게 물었다. 뭐가 제일 좋았냐고. 애들은 둘 다 똑같은 대답을 했다. Empire State Building 꼭대기에서 본 뉴욕 야경이라고. 남편은 나이아가라 폭포. 나는 당연히 메인에서의 밤하늘. 남편과 아이들은 메인의 밤하늘을 두 번째로 꼽았다.


사실 아이들은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호텔 밖을 나오는 순간부터 미국 촌아이들은 숱하게 부딪히는 사람들, 차들, 소리들로 가득 찬 그 문명의 활기를 온몸으로 즐겼다. 이십 대를 앞에 둔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살아내야 하는 그 문명의 세계를 두 팔 벌려 반겼다. 찬란한 문명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야경이 그들의 가슴에 꽂힌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을까. 앞으로 부딪히고 끌어안고 뚫고 나가야 하는 그 거대한 세계가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시간이자 공간이므로.


언젠가 본 잊히지 않는 문구가 있다. 인생은 확장 - 심화 - 회귀의 과정이라고. 이 아이들은 자신을 펼치며 나아가는 확장 단계에 있고 남편은 아직 심화, 나는 이제 회귀의 초입 단계인 듯하다. 나는 문명의 찬란한 불빛이 멋있긴 하지만 더 이상 가슴이 뛰지는 않는다. 불빛의 오염(light pollution)이 하나도 없는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이 더 설렌다. 나는 이제 어릴 땐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물을 즐겨 먹으며, 새삼 사투리가 불쑥불쑥 튀어나오며, 어릴 적 지루하기 짝이 없던 자연이 사무치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회귀. 내 몸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내 마음이 향하고 있다.


천체 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우리를 모두 별 먼지’와 같다고 표현하는데, 우리 몸을 구성하는 산소, 탄소, 철, 칼슘 등의 원소들은 별 속에서 만들어진 뒤 별이 죽으면서 우주에 뿌린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우주 중에 지구가 있고 결국 이 지구에 태어나 존재하는 내 몸에 저 수십 광년의 우주의 역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별이었던 나는 이 땅에서 숱한 문명의 불빛에 온몸과 마음을 불사르는 확장과 심화를 거쳐 이제 다시 하늘로 돌아갈 회귀를 꿈꾼다. 하늘의 별은 결국 내가 온 곳이며 내가 돌아갈 곳이다.


인생은 여행이고 여행은 인생이다. 똑같이 낯선 곳으로 나아가고 부딪히고 깊어지다 마침내 돌아오는 과정이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옷을 입고 이 지구에 여행 왔다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별과 같은 존재들이다. 유한하나 무한한, 태초이자 찰나인, 무수히 많으나 단 하나뿐인 빛나는 존재이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도 내 나이가 되면 불빛보다 별빛이 더 좋아질까. 저 아이들도 어느 날엔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이 태어난 소명이 무엇인지 물어보게 될까. 이 여행에서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홀가분하게 돌아가길 꿈꿀까.


‘지혜로 빛나는 별’은 하늘이 내게 준 소명이고 그 소명의 빛으로 많은 이들에게 닿기를 오랫동안 꿈꾸어왔다. 비록 땅에 코 박고 사느라 그 소명을 잊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때론 오지랖으로 때론 후회로 때론 뿌듯함으로 좌충우돌 살다가 언젠가 이곳에서의 여행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저 밤하늘을 바라본다.


두 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과 나는 남편에게 감사의 허그를 했다. '너무 고맙다고, 정말 수고했다고, 진짜 진짜 좋았다고, 아빠 최고' 등등의 말과 함께. 나도 우리 모두도 이 삶의 여행이 끝나 돌아가면 태초의 그 점, 존재자, 자존자 신에게 '여행을 보내줘서 감사하다고, 여행이 참 좋았다고' 인사할 수 있기를. 꼭 감사의 인사를 깊이 머리 숙여 전하기를.


내 소명의 구절.

Those who are wise will shine like the brightness of the heavens, and those who lead many to righteousness, like the stars for ever and ever. (Daniel 12:3)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은 너무 어두워서 대신 그날의 감동과 가장 유사한 사진 두 장을 나사 사이트에서 발췌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꼭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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