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좋아해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걍 Jul 02. 2023

00. 넌 나랑 잘 될 것 같아

너 뒤통수만 보고 알았어



내가 먼저 좋아했다. 0.01초였겠지만 말이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눈에 담고 산다. 이건 콩깍지도 아니고 렌즈삽입술 정도 되는 것 같다.



2018년 1월

루이스 다리를 건너는 20m 앞에 뒤통수만 봐도 한국인임을 알 수 있는 애매한 투블록머리. 회색가디건에 청바지 나도 집에 있는 하얀 운동화, 스파브랜드 검정 백팩. 난생처음으로 낯선 사람 뒤통수를 보고 0.01초 정도

 ‘와 저 한국인이랑 나랑 여기서 만나서 결혼도하고.. 오..!’

이미 저 뒤통수와 결혼한 사이인 나에게 뒤통수 주인이 갑자기 뒤돌아서서 물었다.

“한국인이에요?”

“네..”


... 방금 파혼했다.



아무튼 몇 년이 흐르고 나는 그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널 좋아했다고.



파혼한 남자는 계속 말을 걸었다. 그렇게 같이 다리 위를 걸어갔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묻는 뻔한 그런 거. 몇 살인지, 여행온건지, 혼자 왔는지, 언제까지 있고 어디로 가는지 뭐 이런 거.


올해 스물넷이 된 우리는 둘 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동갑내기였고 나는 내일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혼자 온 여행객. 너는 형과 여행 와서 혼자 야경 보러 나온 내일이면 리스본으로 나는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사람.


그렇게 서로의 마지막 밤에 1리터짜리 로컬맥주를 두 병 마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너는 나를 좋아할 것 같았다.





이번 여행 직전까지 좋아하던 남자에게 농담 속에 진심을 섞어 ‘겨울에 축구 보러 스페인 같이 가자’라고 포장해 냅다 던져버린 적이 있다.

당연히 잘 안 됐고 이후로 몇 달을 나 혼자 짝사랑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지 한 시간도 안 된 나에게 “다음에 스위스 같이 가자”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이 꽤 충격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그날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뒤통수와 결혼한 건 어디까지나 비밀이었고 스위스에 같이 가자는 그 말이 왠지 지켜질 것 만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 후로 내가 그에게 빠지는 데 걸린 시간은 10달.

그 사이 비행기를 좋아하는 그는 가장 더운 해 여름 미국으로 떠났다.



스물아홉 여름, 처음 만난 그날 너는 내가 널 사랑한 0.01초를 뺀 모든 시간의 나를 사랑하려 했었다고 말해주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