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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11. 2021

미신을 믿는 즐거움

Day 15

애인이 한 말이었다. 아니 글쎄. 사무실을 정리하다가 서랍장 바닥에서 종이쪽지가 나온 거야. 왕이라고 크게 적혀 있는 종이가 붙어있더라고. 애인은 그게 직장상사가 붙여놓은 쪽지라고 말했다. 왕을 써서 붙이면 운이 따르는 미신 때문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나의 어릴 적 집이 떠올랐다. 내가 살던 집의 식모방에는(물론 식모가 있었다는 게 아니라) 커다란 서랍장이 있었다. 그리고 칸마다 온갖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는데 난 서랍들을 헤집으며 어떤 물건들이 숨어있는지 살피는 게 재밌었다. 그러다 서랍의 바닥까지 드러날 때면 늘 왕이라고 써서 붙인 쪽지가 나타났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려서는 잘 알지 못했다. 까맣게 잊고 살다가 애인의 이야기를 들어서야 떠오른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모 대통령 후보의 경선 토론회에 관해 대화하다가 나온 말이었다. 그 후보는 손바닥에 조그맣게 왕이라고 적은 뒤 토론회에 참석했다. 그의 손바닥이 카메라에 담겼고 이후 언론보도가 쏟아졌다. 미신을 믿는 후보라는 논지였다. 나도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기억을 되짚으니 우리 집도 같은 미신을 믿은 셈이었다.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다만 어려서는 서랍장에 붙어있던 그 쪽지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쪽지는 아주 오래 전에 붙여 놓았는지 누렇게 변해있었다. 종이는 닳아서 얇게 퍼석거렸다. 아무래도 미신을 믿었다기보다는 그 종이의 오래된 느낌이 좋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당시에 내 나이보다 더 오래된 쪽지일지 몰랐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느 흰 종이 위에 왕이라고 적어넣던 이를 상상하면 나는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 누가 쓴 쪽지였을까. 미처 그때는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후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에 할머니는 조그마한 붉은색 종이 뭉치를 손에 쥐어 주셨다. 그분께서는 지갑에 넣고 다니며 몸에서 떼어놓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종이쪼가리에 특별한 효능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들고 다녔다. 서랍장의 쪽지를 볼 때처럼 아득한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절대 펼쳐보면 안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그 종이쪼가리를 여러 번 펼쳤다. 안에는 작게 접힌 부적이 들어있었다. 노란 종이의 부스럭거림과 붉은 색 알 수 없는 문양이 신기했다. 대체 누가 적어넣은 부적일까. 그때 나는 눈매가 날카로운 무당을 상상하며 들뜨고는 했다.


이제 와서는 무당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무서운 이야기에서나 듣던 귀신 같은 존재였지만 지금은 무교가 엄연한 종교이자 우리의 전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 옛날에는 굿을 하는 날이 마을의 잔칫날이었다는 것과 무당이 한 마을의 공동체를 엮어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았다.


미신을 더는 싫어하지 않는다. 어느 때는 몸서리치게 싫기도 했다. 오래도록 할머니와 함께 살며 생긴 습관이었다. 할머니는 자른 손톱을 꼭 변기에 버리라고 하셨다. 나는 그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할머니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늘 그래야 좋다는 뜻 없는 대답뿐이었다. 할머니가 강요하는 미신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다. 나는 그게 불쾌했다. 어떨 때는 큰소리로 궁시렁거리며 대들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성이 났던 걸까. 이제는 차분히 흘려듣는 편이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는 더 많은 미신들을 알게 됐다. 이를 테면 집들이를 온 어른들의 말이었다. 화분이 사람 키보다 크면 안 좋다는 말. 누군가 선물로 들고 온 원앙 목각과 명주실 같은 거. 앞으로 더 많은 관문들이 느껴진다. 어쩌면 결혼식부터 하나의 거대한 미신일지 모른다. 다른 말로 전통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약속들을 따르며 살아간다. 그러지 않고서야 우리는 다른 이의 마음, 나아가 제 자신의 마음조차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신을 따른다는 것이 꼭 나쁜 건 아닐지 모르겠다. 서로의 마음에 안심이 된다면 때로는 미신을 믿어볼 법하다.


이번 명절에는 전염병 때문에 가족들이 모이지 못했다. 이렇게 넘긴 명절이 벌써 세 번째였다. 할머니는 늘 제사를 중요시 하셨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도리가 없었다. 차례상 없이 지나가는 명절은 허전하게 느껴졌다. 부대끼며 사는 일이 피곤하다지만 가끔은 먼 친척끼리 모이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죽은 이에게 밥을 차려준다는 생각은 참 터무니없다. 그래도 남은 밥을 산 사람들끼리 나누어 먹는다는 게 우리에게 미신이 남아있는 이유이지 싶었다.


그러니 내 손에 부적을 쥐어주던 마음 같은 것을 생각해본다. 여전히 미신을 만날 때면 기분이 언짢다. 하지만 누군들 미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람이 기계처럼 살아갈 수 있겠는가. 오히려 사람은 자로 잰듯이 살아가는 존재보다 때때로 어리석은 존재에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리는 그것을 소위 인간미라고 부른다.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느끼며 사랑하는 능력. 실은 알고 모르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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