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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16. 2021

생일 축하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Day 20

초는 하나만 주면 된다고 했다. 점원은 폭죽도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막상 생알상에 케이크를 올려 놓을 때는 초를 숨겼다. 낯간지러웠기 때문이다. 케이크의 장식들은 유독 화려했다. 꽃과 나뭇잎, 그리고 붉은색 성벽을 닮은 초콜릿이 아름답게 얹혀 있었다. 이윽고 나는 케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놓을 생각이었다. 그때 친척이 말했다. 할머니가 먼저 썰게끔 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뒤로 숨겼던 초를 꺼냈다. 기왕이면 불도 붙여요. 두 개의 성냥 중 하나는 불 없이 연기만 뿜다가 꺼졌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불이 없겠네. 옆에 있던 동생이 농담조로 말했다. 숨을 죽이고 마지막 성냥의 붙을 붙였다. 손끝의 열기 속에서 초 하나에 불이 옮겨붙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함께 모인 가족들이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는 가느다란 초에 붙은 불꽃을 후 불어서 꺼트렸다.


백신 후유증이 생각보다 뒤늦게, 그리고 생각보다 크게 찾아왔다. 할머니의 생일상 앞에 앉아서도 나는 고개를 숙여 졸거나 아픈 팔뚝을 감싸 앉았다. 심한 몸살을 앓은 이도 있다고 했다. 마치 독감에 걸리기 직전의 으슬으슬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동생은 자신이 먹던 타이레놀을 건네주었다. 밥을 먹다가 말고 나는 약부터 삼켰다. 부쩍 추워진 날씨 탓도 있을 것 같았다. 지난 해에 생일상을 먹을 때도 이렇게 추웠나. 신문에는 이상기온이라는 뉴스가 나왔다. 언젠가는 할머니를 모시고 용봉탕을 먹으러 갔던 날이 있었다. 그때 생일상에서는 옷이 얇았다.


하마터면 생일을 챙기지 못했을 것이다. 갑작스레 전화를 준 건 엄마였다. 주말에 가족들과 식사를 할 테니 나도 얼굴을 비추라는 것이었다. 문득 그 전화를 어째서 아버지가 아닌 엄마가 한 것일까 싶었다. 따지자면 할머니는 아버지의 엄마이니까. 이런 비교가 유치할 수 있겠으나 누군가에겐 중요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시어머니의 생일을 챙길까. 내게 엄마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말했다. 다만 나는 아버지가 할머니께 선물을 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였다. 나는 엄마의 생일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때 우리가 무슨 음식을 먹었지? 막연한 목소리들만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일전에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에 대해 고심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생일을 축하하는 것일까. 내가 태어난 날과 당신이 태어난 날을 기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만약 생일이 축하 받을 일이라면 그건 세상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끔찍하고 두려운 곳이라면 어떻게 세상에 태어난 일을 축하할 수 있을까. 만약 이 곳이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당신을 둘러싼 풍경만큼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약속. 꼭 그런 마음가짐이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하는 마음 같았다.


가끔은 생일상에 올라오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들뜨기도 한다.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일은 치팅데이의 그럴 듯한 명분일지도 모르겠다. 마침 오늘은 두 개의 기념일이 모인 하루였다. 애인은 꼭 오늘이 우리가 이 집에 살게 된지 백 일이 되는 날이라고 했다. 점심에 할머니를 뵙고 저녁에는 집에서 스테이크를 썰기로 약속했다. 먹을 복이 넘치는 날이었다.


이사 백 일이라는 기념일이 따로 없다는 건 알았다. 막상 백 일이라는 이름을 붙여보니 우리가 이 집에서 세 달 넘게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껏 꾸민 거실에서 나와 애인을 사진을 찍기로 했다. 집에서 나누어 먹는 식사인데도 화장을 하고 흰 셔츠를 입고 앉았다. 짧은 삼각대 탓에 나는 휴지통 위로 빈 박스를 여러 개 쌓은 뒤 그 위에 삼각대와 휴대폰을 세웠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다가도 점점 진심이 되었다. 더 예쁜 사진을 찍고 픈 마음에 카메라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각도를 맞췄다. 덕분에 스테이크는 차게 식었지만 역시 소고기는 소고기라는 생각을 하며 우리는 밥을 먹었다.


대략 육 년 전이다. 애인과 내가 백일이었을 때. 우린 둘 다 이십대 초반이었다. 그때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백일을 챙기던 나와 애인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게 바로 우리 이야기인데도 마치 한참 어린 동생들을 보는 마음이 된다. 이 간격은 어디서 온 걸까. 바로 눈앞에 있는 아이들처럼 생생한 장면이지만 벌써 수 년 전의 일이라는 게. 고작 하루 전의 일도, 한 시간 전의 일도 더는 세상에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향수는 신비롭다. 향수는 이미 사라진 시간을 다시 불러오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념일을 챙긴다는 것은 이미 사라진 시간 속으로 잠시 다녀오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와 애인이 새 집을 얻은지 백일 째 되던 밤은 결코 다시 오지 않는다. 물론 이건 슬픈 일이 아니다.


언제든 우린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들여 요리를 만들고 불편한 옷을 차려 입고 수십 번 사진을 다시 찍고 낯간지러운 노래를 부르는 일. 쓸 데 없다고 느끼는 것이 생각보다 쓸 데 많은 경우가 있다. 이를 테면 나는 오늘 초를 하나라도 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어번 입김을 불어 초에 붙을 불을 끄시던 할머니의 표정이 마음 속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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