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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때아닌 Oct 26. 2021

눈빛은 일렁이며 남는다

Day 30

너무 많은 것이 변했다. 새 집에서 살게 된 일. 벌써 네 달 전의 일이다. 사람은 쉽게 적응한다. 어딘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그러니 돌이켜보면 막상 변한 것은 없다. 결국에는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아침 저편에서.


재택근무가 길게 이어졌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며 우리 회사는 전일제 재택근무를 실시했고 몇 주 뒤부터는 한 주의 이틀을 집에서 일했다. 우연히 애인과 살 집을 구하던 즈음에 나는 재택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덕으로 새 집에는 더 서둘러 적응한 기분이다. 점심에는 직접 밥을 차려 먹고는 했다. 우리의 주방을 사용하는 일이 좋았다. 무엇이든 쓰고 나면 닳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은 계속 꺼내어 쓰다듬게 되고 결국 좋아하는 것은 닳아 없어진다. 사랑하고 아끼는 것들. 그게 사람이건 물건이건. 애정을 담은 무엇이 사라져 없어지는 일에 대해선 받아들여야 한다.


머물 집이 생긴다는 것은 그만큼 잃어버릴 물건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작은 방에도 채워넣을 것들이 무수하다. 그만큼 나는 이별과 더 친숙해질 것이다. 꼭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걸어나올 때에 마치 어른이 된 것 같던 기분. 어쩌면 어른스럽다는 것은 담담하다는 뜻일까. 어린 나와 어린 애인이 함께 살림을 차려나가는 일은 담담함 연습이라고 부를 법하다. 막상 우리는 담담했던 적 없다. 매일 밤 흔들거렸다. 살아간다는 일은 꽤나 두렵다.


실은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애호박 하나를 살 때도 손이 떨린다는 거. 애호박 값은 며칠만에 두세 배를 뛰었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편의점에서 가공식품만 사던 우리의 소비습관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격차였다. 어떻게 며칠 사이에 가격이 오르내릴까. 친한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원래 그래. 비쌀 때 안 사면 돼.


많은 일들이 별 일이 아닐지 모른다.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나는 지난 밤의 약속을 잊고 다시 눈을 감은 채 늦잠에 들 것이다. 이윽고 평소처럼 아슬아슬하게 나서는 출근길에선 괜한 자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게으르고 무기력한 하루에 대하여. 아마 나는 아직 살지 않은 무수한 하루 동안에도 같은 모습이 아닐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돌에게 노래를 기대하지 않듯이, 돌에게는 돌의 자리가 있고 사람은 변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죽을 우리들에게 대견하다는 말을 아낄 필요는 없다. 


물론 이런 말로는 부족하다.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너무 빨랐다. 어느새 삼십 일이 지났다.


처음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던 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슬럼프가 있었다. 더는 글이 써지지 않았고 나의 일에도 마음이 차게 식었다. 매일 글을 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었으나 전에 하지 않던 작업들을 갑작스레 벌리면 삶은 종종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곤 했다. 다행히 삼십 일 동안 글을 쓰며 나는 자존감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당분간 매일 글쓰기는 하지 않겠으나 대신 다른 무엇을 삼십 일 간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내일부터는 여섯 시의 일어나기를 서른 번 반복할 것이다.


물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하룻밤 새에 나의 얼굴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될 순 없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늘진 얼굴 한 켠에 햇볕이 들 듯. 사람에게는 고개 한 뼘의 노력만이 허락된다. 어쩌면 대단한 일일 수도 있다. 고개를 돌리면 풍경이 바뀐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이고 그의 걸음걸이와 표정에 비친 마음을 보게 된다. 아무래도 좋은 삶은 좋은 풍경이 아닐까. 좋은 풍경 속 좋은 이야기일 것이다. 아름다운 삶을 상상하면 늘 어떤 장면과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의 감정선이 떠오른다. 나의 삶은 어떤 이야기가 될까. 문득 글을 쓰기로 마음 먹고 처음 의자에 앉았던 삼십 일 전의 내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한 달 간의 이야기에는 어떤 제목을 붙일까.


한 달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지겨운 군대 얘기지만 나는 매번 훈련소를 떠올리고 만다. 한 달이 조금 넘고 두 달에 조금 못 미치는 시간 동안 나와 동기들은 훈련소에 있었다. 군대를 늦게 간 편이었다. 하필 추워지기 시작하는 계절에 내가 입소한 부대는 춥고 바람이 매섭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변에 걱정을 샀다. 애당초 슬픔이 많은 성격이었다. 누구든 내가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입소식 날에 애인은 부모님과 함께 나를 배웅했다. 커다란 강당에 나와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맞춰서 섰다. 가족들은 바리케이트 너머에 모여서 입소하는 사람들을 애틋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제 가족분들께서는 귀가해주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강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조그만 유리문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뒤를 돌아서 가족과 애인을 찾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 가리워져 내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낯선 뒷모습들 사이로 애인의 조그마한 얼굴이 가까스로 보였다.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 까치발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위태롭게 발을 세운 채 내게 손을 흔들던 애인을 생각하며 한 달을 보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애인과 다시 만났을 때 입소식의 우울은 지난 일이 되었다. 그렇지만 삼십 여일 전에 나를 쳐다보던 애인의 눈빛은 그대로 나의 기억 속에 남았다. 우리의 삶은 변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어쩌면 사람은 두 개의 삶을 산다. 지금 여기의 삶 뒤편으로는 우리의 기억 속 마당으로 이미 지나간 삶이 길게 펼쳐진다. 어쩌면 기억 속의 삶은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얼굴이 되거나 그리운 표정이 되고 잊었던 목소리를 되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 그게 글을 쓰는 일이든, 아니면 오래된 사진을 꺼내 보는 일이든. 다행히 하루치의 글을 마친다. 하루치의 이야기가 고요히 이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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