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때아닌 Feb 06. 2022

계속 아무도 모르는 글을 쓸 것

모든 종류의 작은 예술을 사랑합니다

한 번은 문학3에서 열었던 간담회에 간 적이 있다. 다양한 독립문예지의 편집자들이 모여 각자의 작업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낯선 잡지의 이름을 달고 그들은 자신의 책을 정성껏 소개했다. 이윽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내 근처에 앉아있던 이가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도 독립문예지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비주얼 문예지라는 콘셉트였다. 나는 그 모양새가 쉽사리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새삼 어떤 변화를 느꼈다. 그즈음 주변에는 독립출판을 준비하는 이가 정말 많았다. 동네에도 독립출판물을 비치해놓은 작은 서점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나도 내 이름이 달린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소책자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그 책을 들고 작은 서점 이곳저곳을 돌며 발품을 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종이인쇄물을 만드는 일과 독립출판씬에 입장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실은 문학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관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신춘문예가 내 인생 최대의 목표였고 어딘가 독립출판씬은 기성문단의 하위단계 같았기 때문이다. 대단히 교만한 생각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생각해보면 독립출판은 문학 장르에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립출판으로 만들어지는 시집이나 소설집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왜 나는 기성문단과 독립출판씬을 엮어서 생각했던 걸까. 단순히 규모를 비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독립출판씬은 독자보다 작가가 더 많은 느낌이다. 독립출판물을 읽는 이보다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이를 나는 더 자주 만났다. 물론 이건 독립출판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대형 출판사에 픽업되어 책을 만드는 일과 정반대의 매커니즘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누구나 독립출판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립출판씬에서는 모두에게 발언권이 돌아간다. 그러나 청중이 없는 무대는 공허하다. 누가 이름 없는 내 소설을 사서 읽을까. 솔직히 말해서 내겐 대형 출판사의 권위가 필요했다.


최근에는 작은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자주 생각한다. 지금 일하는 곳이 공예와 핸드메이드를 다루는 회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연히도 나의 첫 전시는 작은예술지원사업에 당선되어 열 수 있었다. 내 첫 번째 전시는 내 삶을 크게 바꾼 사건이다. 어쩌면 지금의 내 모습은 작은 예술이라는 화두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작은예술지원사업은 말 그대로 소규모 예술창작자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지원금은 1백만원으로 크지 않았다. 나와 친구는 정말 운이 좋게도 사업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그 작은 돈으로 일주일짜리 전시를 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다시 보면 굉장히 어설픈 전시였다. 비용적인 한계가 아니고서도 우리들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전시는 어찌저찌 열렸다. 자세히 보면 빈틈이 많았지만 나름 구색은 갖춘 전시였다. 이후로 내겐 하면 된다는 어줍짢은 철학이 생기기도 했으나 그 편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벽을 무너뜨린 기분이었다. 전시든 무엇이든 그것의 좋고 나쁨을 떠나 그것을 하는 일에는 제약이 없다는 것. 그러니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걸 알았다. 첫 전시를 마치고서 나는 곧바로 두 번째 전시를 준비했다. 이때는 지원금을 받지 않고 모두 내 손으로 전시를 치뤘다. 그외에도 다양한 작업들이 있었고 고스란히 내 아카이브가 됐다.


그래서 나는 세 번째 전시를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이제는 현실적인 생각도 겸하게 된다. 나는 돈 걱정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 되었다.


며칠 전에 함께 소설을 쓰는 친구와 나눈 수다였다. 그의 또 다른 친구는 음악을 전공했다고 한다. 지금은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에겐 취미가 있었다. 기타를 모은다는 것이다. 전공자가 아니고서야 갖기 어려운 취미라고 생각했다. 그게 대학에서 실용음악을 공부했다는 뜻이 아니라도 음악에 관한 깊은 관심과 또는 기타를 직접 연주해본 일이 없고서는 기타를 사서 모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그 사람이 다시 음악을 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아마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거기 내 모습이 겹쳐졌다. 창작을 하다가 멈춘 사람들. 과연 나는 세 번째 전시를 열게 될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전시를 하지 않는다는 점과 무관하게 내 삶은 이미 두 번 치룬 전시의 영향 아래 있다. 음악을 그만 둔 이의 삶에도 기타를 모으는 취미가 남듯이 창작자라는 역할을 겪은 삶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좋은 의미로 말이다.


대신 나는 작은 예술을 하게 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고서 짧은 시간을 들여 쓰는 글들이 그렇다. 괜히 브런치를 개설하기도 했다. 잘 모르는 인디자인을 다루며 무턱대고 소설집을 만들었다. 이제 나는 독립출판씬을 더 이상 하위단계로 느끼지 않는다. 그만큼 이 시장이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이 바뀐 것도 있다. 어떤 이는 모든 사람이 창작자가 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창작자가 곧 다른 창작자의 관객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는 없고 작가뿐이라던 독립출판에 관한 내 오래된 생각은 굉장히 고리타분한 시각이었던 것이다. 독립출판씬에서는 독자와 작가가 나뉘지 않는다. 모두가 작가로서 연결된다. 그리고 이게 작은 예술의 힘이다. 작은 예술에서는 특정한 작가가 권위를 얻을 수 없다. 한 명의 창작자를 무수한 관객이 둘러싸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권위를 얻을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 모든 창작자는 동등하다. 그러므로 작은 예술은 자유롭다.


물론 과제가 남는다. 작은 예술은, 이를 테면 독립출판은 다른 대형 출판사와 달리  번에 여러 부수를 찍어낼 수가 없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모든 사람이 읽을  없다. 기성출판물 중에서 아주 훌륭한 책이 있다면 우리는  책에 관한 독서 모임을  수도 있고 온라인에  책에 관한 에세이를 올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독립출판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읽은 독립출판물을 당신도 읽었을 확률이 극히 낮다. 따라서 작은 예술의 소비자 공동체, 이를 테면 독립출판의 독자 공동체는 우리가 아는 모습과 조금 달라야 한다. 어떤 책을 소개하고 그걸 함께 읽으며 서로 비평을 공유하는 방식일  없다. 아무도 모르는 책을 발굴하고 그걸 함께 지지하며 서로의 취향을 자랑하는 방식에 가까울 것이다.


과연 그건 어떤 형태의 공동체일까. 우선은 나부터 해보기로 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작은 예술에 관한 내 소감을 남길 생각이다. 그 글들이 하나둘 쌓이면 무언가 되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그리고 잘 모르고 시작하는 일이 가장 그럴 듯한 법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