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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Sep 07. 2023

차순이 17

목숨 건 구애

친구는 룡 씨의 이야기를 듣고 왜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걷어차려고 하냐고 펄쩍 뛰었다. 월급 몇 푼 받아봐야 열흘도 못 사는 돈인데 그 돈 벌어 어느 세월에 결혼하고 내 집 마련 할 거냐며 잔소리를 했다. 기 세고 고집불통쯤이야 돈만 있으면 문제 될 것 없다며 다시 가서 감사하다고 하고 얼른 날 잡아 결혼하라고, 그런 기회가 자기한테는 왜 안 오는지 모르겠다며 한마디에 소주 1잔씩 들이키며 말했다. 룡 씨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고 싶었다. 사실 돈은 쓰면 쓸수록 부족하다. 적은 금액이지만 매달 적금을 넣고 남은 금액으로 최소한의 꼭 필요한 곳에만 쓰다 보니 꼭 필요한 곳도 생기지 않아 어느 달은 몇만 원씩 남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상담하며 지내던 친구의 말이 이번에는 옳지 않다고 결론짓고 일어섰다. -난 내 편에 맞게 소박한 여자 만나서 결혼하련다.-


다음날은 회귀종점에서 6시에 출발하는 배차를 받았다. 차는 오늘 대타가 그곳까지 운행해 준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회귀종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곳에는 서너 명이 잘 수 있는 방과 회사와 계약해 기사들 밥을 해주는 식당이 있다. 식사는 근무날이 아니어도 언제든 시간 맞춰가면 먹을 수 있다. 내일 새벽 6시에 출발하여 개봉동까지 오면 아침 8이다. 그녀는 등교를 위해 이미 갔을 것이니 내일은 부딪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경 쓰이는 일이 생긴 것이 불편하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지새우고 운행을 위해 일어나 차량으로 갔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추석 앞에 새벽의 날씨는 서늘했다. 마른 수건으로 앞유리의 이슬을 닦아내고 차량내부도 깨끗이 청소했다. 신경 쓰지 않겠다고, 이미 끝난 일이라고 고개를 저어도 자꾸만 여대생의 새초롬한 얼굴이 따라온다. 비로 쓸면 쓸려갈까? 걸레로 닦으면 지워질까? 쓸고 닦고 하다 보니 출발시간이 되었다.


운행을 하면서 정류장에 들어설 때마다 기웃거리는 자신을 느끼고 헛웃음을 웃었다. 편도 30개의 정류장을 들어갈 때마다 몇 번이나 기웃거린 것 같다. 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기다리는 자신의 심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종점까지 오도록 여대생이 오지 않은걸 보니 여대생도 단념을 했으리라 생각하면서 요금통을 들고 사무실로 향했다. 지나치는 기사들과 안내양들이 김범룡 씨를 흘깃거렸다. 사무실에 웅성거림도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사무실 문을 연 김범룡 씨는 깜짝 놀랐다. 생의 어머니가 이사장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아이고! 여보게 내 딸 좀 살려주게, 내 딸 좀 살려줘~"

범룡 씨는 어리둥절했다. 요금통을 여직원에게 넘겨주고 여대생의 어머니 앞에 섰다. 어머니는 범룡 씨 손을 잡고 내 딸 좀 살려달라는 말을 반복하며 눈시울을 손수건으로 훔쳤다. 그때 이사장이 말했다.

"어제 처제가 수면제를 먹었네 자네의 말을 전했더니 자네 아니면 살고 싶지 않다는 유서를 써놓고... 아침에 장모님이 깨우러 갔을 때 정신을 잃고 있더라네,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고 깨어나기는 했는데 처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장모님이 불안해하시니..."


노파는 그저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딸만 살려달라며 매달렸고 이사장은 병원 좀 와 달라고 부탁했다. 범룡 씨는 오늘은 근무 중이니 내일 대타를 세우고 가겠다고 했다. 일단은 사람 목숨부터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상황을 판단한 회사에서도 두말없이 다음날 대타를 세워주었다. 일을 하면서도 자신 때문에 수면제를 먹었다는 여대생의 상태가 어떨지 궁금했다.  10시에 퇴근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깜박 잠이 들었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손바닥만 한 동창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찬밥 한 덩이를 물에 말아 단무지랑 먹고 집을 나섰다. 이사장이 적어준 병원은 구로병원이었다.


병실은 1인실이었고 환자용 침대와 보호자용 소파까지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입원비가 적지 않을 것 같았다. 소파에는 이사장의 부인인 큰언니가 앉아있다가 범룡 씨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급히 일어섰다. 대학생은 눈을 떴다가 등을 보이고 돌아누웠다. 범룡 씨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서성였다. 큰언니는 대학생 어깨를 흔들며 말했다.

"현미야, 네가 죽고 못 산다는 네 서방 왔다. 목숨을 걸 데가 따로 있지, 그 잘 난 남자들 다두고 고생길 뻔한 사람한테 목숨을 거니? 쯧쯧!"

범룡 씨는 사가지고 간 주스병이 초라하게 느껴져 그냥 나오려고 했다. 그때 현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언니! 언니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절대로 손 벌리지 않을 거니까 미리부터 걱정하지 마, 난 저분 형편에 맞게 살 거야, 엄마한테도 한 푼도 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 저분 모욕하지 마!"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현미의 얼굴에 꿈속에서 보았던 범룡 씨 어머니의 미소가 겹쳐졌다.


현미는 그날 퇴원을 했다. 수면제는 치사량은 아니었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 퇴원하면서 배고프다며 밥 먹자고 했다. 어딜 갈까 물어보니 병원 근처 레스토랑을 손가락질했다. 범룡 씨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망설이고 있는데 현미는 오늘만 함께 가자고, 결혼하면 저런 곳에 가자는 말 안 할 거라며 팔짱을 끼었다.


그곳은 분위기가 좋았다. 유럽풍의 소품들이 장식되어 있고 잔잔한 클래식이 흐르고 벽 쪽으로 절반길이의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으니 얼굴을 가려주어 주변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현미와 마주 앉은 범룡 씨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자와 마주 앉은 설렘과 밥값이 비싸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섞인 두근거림이었다. 현미는 천연덕스럽게 식사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종알댔다. 식사가 끝나고 차를 마시며 무언가 한마디 해야 한다고 생각한 범룡 씨는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저는 전셋집 마련할 돈도 없어요. 부모님은 두 분 다 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외삼촌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습니다. 전 그쪽에게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습니다. 어머님 걱정 그만 끼치시고 집안에서 정해준곳으로 결혼하시지요. 저는 그쪽이 내게 이러는 거 부담스럽습니다."

현미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요. 지금까지 어느 것도 부족함 없이 자랐어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빠얼굴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아저씨를 보고 있으면 아빠를 보는 것 같아요. 아빠는 어려서 피난 내려오셨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무일푼으로 장사를 하셨대요. 엄마를 만나 열심히 사시다가 먹고살 만 해졌을 때 폐병으로 돌아가셨다는데 그때가 저 세 살 때였지요. 아빠는 트럭에 짐을 싣고 배달을 다니실 때 꼭 저를 옆자리에 태우고 다니실 만큼 이뻐하셨대요. 기억에는 없지만 느낌은 있는 것 같아요. 전 아저씨가 아빠처럼 믿음직스럽고 편안해요. 그냥 운명 같아요. 아저씨랑 결혼만 하면 다른 건 바람이 없을 것 같아요. 아저씨 형편에 맞추어 알뜰하게 살게요. 결혼예물도 다 필요 없어요. 이런 식당 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범룡 씨는 마음이 움직였다. 웬만한 여자들 자기 형편보고 스스로 알아서 다가오지 않는데 이 여자는 목숨까지 걸며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알뜰하게 살겠다며 애원한다. 볼 것 하나 없는 자신에게 매달리는 대학까지 다닌 여자가 안쓰럽기도 했다. -이 여자를 위해서 나도 목숨 한번 걸어보자!- 범룡 씨는 결심했다. 현미에게 믿음직한 남편이 되어주리라는  감정이 뜨겁게 솟구쳤다.


"그럼 결혼자금으로 어머니께 아무것도 받지 마요. 제가 월세방 얻을 돈은 있으니까 우리 힘으로 시작해 봅시다. 알뜰하게 살면 먹고는 살 거예요. 현미 씨 고생시키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 혹시라도 어머니께 손 벌리고 언니들한테 힘든 내색 안 한다고 약속해 줘요"

현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그럼요. 어떤 상황에도 친정에 아저씨 허락 없이 손 벌리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오늘은 그만 집에 간다며 일어서 지갑을 꺼내자 현미가 앞서가서 계산을 했다. 범룡 씨의 지갑엔 천 원짜리 몇 장, 국밥 두 그릇값 정도의 돈이 들어있었다. 현미가 지불하는 돈을 얼핏 보니 만 원짜리 몇 장이 건네지고 있었다.


다음날, 손윗동서가 될 이사장이 회사에 전화해 달라는 메모를 남겨 놓았다. 전화를 걸으니 비번날 공장으로 찾아오라며 주소를 알려주었다. 이제 마음을 정한 이상 내칠 이유가 없었다.


-다음은 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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