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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Sep 25. 2023

차순이 22

은혜를 갚을 때

현미는 범룡 씨와 문식이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언니오빠들에게 갖은 말을 퍼붓고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알 수 없는 설움들이 목까지 찬 듯 답답했다. 남편, 범룡 씨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손을 잡았다. -우리 같이 힘내요. 제가 문희 유치원 갈 동안만 키우고 취직해서 당신 무거운 짐 덜어드릴게요.-


범룡 씨는 다음날 느지막이 공장에 가서 사표를 다. 범룡 씨가 총각 때 살던 신월동으로 집을 옮기고 그곳에서 가까운 버스회사에 취직하기로 했다. 강자와 여공은 자취방을 얻어 내 보낼 생각이었다. 차분히 모든 일이 정리가 되려는 즈음 현미 씨가 쓰러졌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범룡 씨를 다독이더니 속으로는 화가 쌓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자리를 알아보러 나간 범룡 씨를 마중하려 문희를 업고 문식이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서성이다 쓰러졌다. 뇌혈관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응급처치로 생명은 건졌지만 정상이 아니다. 말도 어눌하고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아 간단한 집안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큰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치료가 필요하다 했지만 병원비가 감당이 안되어 약으로만 버티고 있는 것이다. 범룡 씨는 당장 생활비와 약값을 벌기 위해 곧바로 버스회사에 취직했다. 이삼일 일하고 하루 쉬는 생활에 집안일을 모두 챙길 수는 없었다. 며칠이 지나니 집안은 여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것이 확연하게 표시가 났다. 비번날에는 아이들을 씻기고 청소를 해서 좀 사람 사는 같다가도 이번처럼 3일씩 집을 비울 때면 집도 아이들도, 현미 씨도 엉망이 된다.


그날 이후 현미의 형제들은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 강자가 자취방으로 가면서 이사장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부인에게 전달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범룡 씨는 출퇴근 시간을 줄여줄 신월동 쪽에 관리가 쉬운 연립주택 1층을 알아보고 . 그러나 보증금이 부족해서 마음에 드는 집이 나왔는데 계약을 못하고 좀 더 싼 집을 찾고 다.




양희 곤로에 물을 데워 문식이와 문희를 씻기머리를 빗어 단정하게 묶어주었다. 물수건으로 현미의 얼굴과 손을 씻어주고 요강을 비워 비누로 박박  씻었다. 이제 서른 살, 미모의 여대생, 부잣집 막내딸이었던 현미와 범룡 씨의 러브스토리에 자신의 사랑도 그러하리라 꿈꾸었는데, 이 아름답고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까지 망가지기도 하나 싶어서 눈물이 났다. 박봉에 철야까지 짐승처럼 일하며 허덕이던 자신을 신원보증서까지 써주어 좀 더 큰 세상으로 내보내 주었던 김범룡 씨, 자신이 올 때마다 따끈한 밥을 지어 상을 차려주던 현미사모님,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 지금이 바로 그때라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 적금 통장을 보았다. 매달 월급의 절반인 15만 원은 시골집으로 보내고 15만 원은 적금을 넣었다. 삥땅으로 가져온 돈으로 생필품을 사고 기숙사비를 냈다. 옷은 철마다 지급받는 유니폼에 의지하고 외출복은 청바지와 티셔츠면 충분했다. 거의 돈을 쓰지 않는 양희에게 입출금 통장에도 적지 않게 모였다. 그러나 부정한 돈이라고 안내양들이 사주는 껌하나도 씹지 않았다는 말이 떠 울라 입출금 통장의 돈은 내어놓기가 부끄러웠다. 적금 통장을 펼쳤다. 매달 빨간펜으로 적은 숫자가 열 줄이었다. 줄만 더 적으면 몇 프로의 이자가 붙어 200 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 그때 정기예금으로 넣을 예정이었지만 현미사모님과 아이들이 당장 불편한 것을 면하는 게 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한댓가로  받은 깨끗한 돈만 모은 통장이다. 이 정도면 범룡 씨 부부를 도울 자격이 있는 돈이다. 은행에 들러 해약을 했다. 그리고 64번 좌석버스를 기다렸다.


양희가 타는 것을 보고 범룡 씨는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알고 왔냐며 미소를 짓다가 집에 갔었다고 말하자 얼굴에 그늘이 스쳤다. 턱이 뾰족해지고 얼굴색이 칙칙했다. 한꺼번에 자신의 인생에 벌어진 일들을 혼자 감당하느라 버거워진 탓일 것이다. 양희는 은행이름이 적힌 봉투를 내밀었다. 또다시 눈이 커진 김범룡 씨에게 월급날 봉투째 들고 가서 깨끗한 돈만 적금으로 모은 것이라고, 그러니 집 얻는데 보태서 사모님과 아이들이 불편하지 않고 범룡 씨의 출퇴근길도 가까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범룡 씨의 퀭한 눈이 젖었고 양희의 눈앞도 흐려졌다. 두 사람의 분위기에 버스 안도 숙연해진 듯했다.




차에서 내려 기숙사로 돌아오면서 만기를 앞두고 해약적금 생각에 허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빈털터리지만 건강해서 일할 수 있는 자신이 몇 배나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채워지며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고 있었다. 양희는 다시 열심히 일했다. 스무 살이 되었고 안내양생활 3년을 넘기고 있었다. 사감들과 여전히 잘 지냈고, 기사들도 양희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었고, 정산실에서 한 번도 불편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다시 은행을 드나들면서 500 만원만 모아지면 안내양을 그만두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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