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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Mar 01. 2024

12살 현숙이

너는 큰딸이니까!

"현숙아! 막내 좀 업어라."


국민학교 5학년 현숙이는 학교에 가려고 책보를 싸고 있었다. 어제 방과 후도 막내를 업고 3살짜리 현자와 5살짜리 인학이를 돌보느라 숙제도 하지 못했다. 얼른 아침밥을 먹고 일찍 학교에 가서 친구들 숙제공책을 빌려 베껴서 숙제검사를 받으려고 마음이 바쁜 상태였다. 그런 현숙이를 엄마는 밥도 먹기 전에 막내를 업으라고 부르는 것이다. 책보 싸는 손이 멈추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막내를 업고 아침밥을 짓고 계실 엄마의 목소리는 부엌에서 연이어 들려오고 있었다.


"현숙아!~ 이지지배가 왜 대답을 안혀? 부엌으로 얼른 와~" 


엄마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그러나

지금 막내를 업으면 현숙이는 학교에 갈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엄마의 부르는 소리는 윙윙 귓가에 공명처럼 떠돈다.

중학교1학년 오빠와 3학년동생, 1학년동생, 그리고 미취학 동생들이 엄마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3살짜리 동생은 현숙이를 보고 부스스한 얼굴로 다가온다. 현숙이는 책보를 들고 일어섰다. 동생이 품에 안기기 전에 얼른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을 바쁘게 했다. 다가오는 동생을 밀치고 낡은 검정고무신을 찾아 신고 도망치듯 뒷문으로 빠져나와 학교로 내달렸다. 3살짜리 동생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가 현숙이를 따라오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해 겨우 숨을 고르고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엔 당번들이 벌써 와서 교실 정리를 하고 있었다.

당번 중 한 명에게 숙제 좀 보여달라고 사정하여 막 베끼 있을 때였다.

당번들이 모두 현숙이를 쳐다보며 "너네 엄마 왔어"라고 했다. 출입문을 바라보던 현숙이는 울컥 눈물을 쏟았다. 그곳엔 엄마가 막내를 업고 현자와 인학이를 데리고 서계셨다. 그리고 빨리 오라는 표정으로 현숙에게 손짓했다. 현숙이는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하나둘 급우들이 등교를 하고 조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도록 엄마는 교실밖에 서 계셨다. 흘끗흘끗 쳐다보던 급우들은 "! 현숙아! 너 애기 보러 가야지?" 하며 킥킥거렸다. 현숙이는 피함을 견딜 수 없었다. 숙제를 베끼던 공책과 책보를 그대로 두고 엄마에게로 갔다. 엄마는 포대기를 풀어 막내를 현숙이등에  업혀주고 현자와 인학이 손을 넘겨주면서  "언니랑 놀고 있어, 엄마 돈 벌어서 맛있는 거 사 올게" 하며 바쁜 듯 돌아섰다.


세명의 동생을 업고, 끌어안으면서도 현숙이는 엄마 등뒤로 볼멘소리로 물었다.

"왜 나만 맨날 동생들 봐야 돼?" 질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설움이었다. 바삐 돌아섰던 엄마는 고개를 돌려 현숙이를 윽박지르듯 쳐다보며 말했다.

"지지배야! 네가 큰딸이잖여? 큰딸잉께 동생들 봐주고 혀야 엄마가 일하러 가지! 그래야 쌀도 팔고 너 육성회비도 낼 거 아녀? "




갓 12살이 되고 국민학교 5학년이던 현숙이에게 처음으로 큰딸이니까 큰언니니까 라며 장녀로서의 역할을 강요받았던 기억이 새롭다.

가난한 집의 큰딸 현숙이 부모는 남의 집 논으로 밭으로 품팔이를 다니셨다. 예전에도 부모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셨지만 결석을 하고 동생들을 돌보라는 강요는 받지 않았었다. 학교를 파하고 몇 시간 놀아주면 되었다. 그런데 12살이 되어 5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고부터는 아예 결석하고 하루종일 취학 전의 동생들을 돌보라는 강요를 받게 된 것이다.


임금이랄 것도 없이 하루 일하고 곡식이나 몇 푼의 전을 받아와 9 식구가 연명하던 시기였다. 막 젖을뗀 막내와 세 살짜리, 5살짜리 아이들을 데리고 품 팔러 갈 수는 없었을테고, 커가는 아이들 하나둘 학교에 들어가고, 중학교에 다니는 큰아들에게 들어가는 얼마간의 돈이  가난한 부모에게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떠오른 생각이 큰딸에게 부담을 나누어주는  것이었으리라.


그해 현숙의 5학년 학교생활의 절반은 결석이었다.  결석하는 날엔 어김없이 현숙의 등에 막냇동생이 업혀있었고 양손엔 3살짜리 여동생과 5살짜리 남동생의 손이 잡혀있었다. 교실대신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 운동장 그네틀주변에서 절반의 시간을 보내며 5학년을 보냈다. 그 그네는 새것으로 교체되어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60살 현숙의 기억속에 12살 현숙의 모습은 동생들과 함께 코흘리며 얼룩진 얼굴로 교실안을 동경하던 모습으로 생생히 살아있다.


그 시간들이 한국에 태어난 여자여서 그것도 큰딸이어서 겪어야 했던 일 이었음을 이제야 알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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