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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구일 Jan 05. 2022

당신은 글과 어떤 관계를 맺어 왔나요?

글Ego 세 편 쓰기 챌린지 #1

 학창시절, 답안지를 맞추기 위해 글을 썼다.

 직장생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글을 썼다.

 나의 실력을 증명하고 가치 있는 사람임을 평가받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글을 써왔다.

 자기소개서, 일기, 낙서에 이르기까지 나를 표현하거나 그를 거울삼아 되돌아보기에, 때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놀이이자 취미로, 글을 쓰기도 한다. 친구들과의 숱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수없는 문자를 끄적인다.


 참신한 질문이다. 이토록 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거의 달고 사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소설가의 꿈을 가진 내겐 더욱. 나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도 내게 '글과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적 없으니,  문화 시대에서 공기와도 같은 것이 바로 글임에도 말이다.

 번뜩이는 직관으로, 내게 글이란 나의 분신이다.

 표현의 수단이기에 그렇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주로 생각을 드러내거나 재밌는 이야깃거리들을 공유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글이란 무형의 존재를 특히나 우리네 생각을 실체화하기에 가장 쉽고 간단한 도구다. 육신은 정신을 닮는다. 나의 글 또한 내 생각을 오롯이 담는다. 과연 분신(身)이다.


 글을 읽는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때론 내가 쓴 글을 읽으며, 피드백. 삶을 돌아보거나 생각을 갈무리해 앞으로의 행보를 개선하기도 한다. 

 기록이란 생각, 심지어 행적을 저장한다. 즉 누군가의 혹은 어떠한 현상의 과거를 담는다.

반면 계획이란, 미래를 담는다. 글에는 감상과 확인이 담길 현재는 물론, 내 과거와 미래를 담을 수 있기도 하다. 글쓰기는 정확한 사람들 만든다고, 네 자신을 알라고 서방의 현자들이 남긴 바 있다.

 세상에 또 다른 나를 남기는 일, 그것도 이상에 가까운. 나는 글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누구나가 자신의 분신을 만들고 싶어 하니까.


  창작자의 관점에서, 나는 내가 재밌어 할,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나 자신을 남기고 싶나 보다. 아마 그 사랑 받는 이는 표지 사이에서 웅크리고 있겠지, 그런 날이 오겠지- 라며.

 멋지게 쓰기보단 솔직하게 터놓고, 툭 까놓고 쓰려했는데 장황하기만 하다. 이하 본 글의 초고, 정확히는 초고의 초고, 쓰레기 중의 쓰레기를 남긴다. 이것 또한 나의 영수증으로 남겠지!


* * *


- 무슨 시를 쓴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종로서적에 다니시던 이모에게 극찬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적에서 근무하시는 이모 덕에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왔는데 그 자산이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중학교 때는 무지 연습장에 친구와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 무렵의 나는 여러 가지 꿈을 꾸며 살고 있었는데, 당시엔 만화가라는 꿈이 가장 확고했었다. 물론 이것은 그림실력의 한계로 인해, 학업과 대기업 취직을 바라던 집안 분위기로 인해 진척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최근 만화가의 꿈을 실현시킬, 시도를 해본 적이 있기는 하다. 이 외에도 음악이나 춤을 좋아하여 기타를, 언젠가는 팝핀에 심취한 적도 있다. 수능 직후엔 연기학과에 진학할 생각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은 공과대학을, 군대를, 사업가를 선택했었다. 부업으로 유튜버를 꿈꾸기도 했지만, 이때쯤 되어서야 나는 내 꿈이 뭔지, 내가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지. 내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이다. 인생, 꿈도 모른채. 왜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살 뻔 했으니.

 나는 표현력이 강한편이다. 그리고 무언갈 표현하는 것을 즐긴다. 자꾸만 표현하고 싶어한다. 그 이유는 아직 모른다. 선민의식이 있는건지, 표현하고 인정받으며 자존감을 확립하는데 희열을 느끼는건지, 다수에게 나만의 입지를 쌓아 안정감을 느끼고자하는건지. 모로됐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이야기를 꾸미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이다. 남들보다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가장 즐기는 일이 공상하는 일이요,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고 내 능력 중 비교적 나은 것이 글을 쓰는 일이다.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내가 ‘소설가가 되야겠어!‘라고 결심한 것은 웹소설이 태동하기 시작한 2010년 중반이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웹소설이라는 것은 존재했으며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저 시기를 기점으로 가파르게 성장했던 것 같다. 당시나 지금이나, 금전적인 것에 유독 관심이 없어 이제 안 사실이더라도, 나는 무턱대고 소설가가 된다면 굶어죽기 십상이구나, 월급이 믹스커피 한 잔 값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쵝느들어 그것은 그저 두려움이었을거라고, 집에서도 반대하는데, 탐탁치 않게 여기는데. 세상물정 모르는, 사회경험 없었던 당시의 내가 감당할 수 없었을 뿐. 현재는 조금이라도 더 일찍 마음을 굳히고 꾸준히 필력을 쌓지 않았음에 후회한다. 마치 근육처럼.

 요지는 이렇다. 나의 표현력을 가장 쉽고 빠르게 나타낼 수 있는 수단이 글이다. 내가 춤을 숨쉬듯 잘췄다면, 그림을 여느 만화가들처럼 잘 그렸다면 댄서나 만화가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질문이 매우 마음에 든다. 처음 이 질문을 맞닿뜨렸을 때 묘한 기분이 들었을지라도. 그 묘한 질문이란, 나는 소설가라는 꿈을 꽤 오래 간직하고 있었는데 ‘글’이라는 것이 그것에 가장 큰 축을 차지함에도 한 번도 작가, 생산자인 나와 생산품인 글들에 대한 관계를 정의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토록 핵심적인 질문 외에는 다행히 생각해 둔 것이 몇 개 있다.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한, 무엇을 쓰고 싶은거에 대한 얕은 고찰들. 이번 기회에 깊이 가보도록 하겠다.


 군에서 보고서를 썼다.

 마음이 심란할 적이면 일기를

 스토리만 주구장창 떠올렸고

 소설의 도입부들과, 장면 위주의 글뭉치들, 누군가 그랬든 어차피 초고는 쓰레기다.

 시니컬함, 비관적 사고를 지녔던 20대까지, 하지만 활발함과 선한 성격.


 글쓰기 능력이 특출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려워하지 않았고, 쓸 줄 알았을 뿐. 그런데 책 한 권 쓰기는 왜이리도 어렵던지. 구성을 짜는 것, 개요, 계획 분야를 완결짓는 능력. 어머니 또한 이런 나의 떡잎을 아셨는지 유종의 미를 거두거라 거듭 말씀하셨었다. 초등학교 시절, 일기를 쓰는 것은 퍽이나 부끄럽고 매번 같은 하루를 반복한지라. 상상력과 어휘력이 부족했는지 단조로운 일상을 불려낼 수 없었다. 다만 독후감을 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글짓기 대회도, 어째선지 너댓번은 나갔었다. 물론 입상 경력은 없다. 또 어째선지, 그림 대회도 두 세 번 나갔었다. 원래 그런것일까. 심지어 군에서도 문학 공모전을 진행하는데 한 번 도전해봤다가 그대로 탈락했었다. 착잡하고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알량한 자존심이 뭘 잘했다구 참.


 남중, 남고, 이과에 공대, 군대까지 이르던 나의 테크트리는 나도 모르게 편협한 사고를 갖게 했을지 모른다. 특히나 나는 유독 기억에 남았던 학창시절 교육이, 7차교육 과정 언어에 있는 비판적 사고라는 주제이다.

이 주제를 배울 당시부터 대학시절까지도 나는 이 교육이 사기를 당하지 않도록,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훈련시킨 줄 알았으나, 요즘은 생각이 좀 다르다. 긍정적 사고를 배웠어야한다고, 저 교육으로 인해 나는 한동한 이유없는 비판을 자행한 적도 있고, 사고회로 자체가 시니컬 해졌다 여긴다. 

 어찌됐건, 저 테크트리에서는 편지를 써본 것도 아니요, 심지어 문자도 많이 하지 않았고, 이게 무슨말이냐 내가 진작에 글을 마음 다잡고 썼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내 꿈이고 목표고 이런 것 없이. 그저 아이언맨이 되는 상상이나 하며 돈이 전부인 줄 알았고, 좋은 직장에 꼭 가야만 하는 것으로 알았다.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을 얻는 것. 그 이후에 취미활동을 하던 맛있는 음식을 먹던 하면서 사는게 행복한 삶이라고.

그러다 20대 중반 무렵부터 자기계발에 눈을 뜨게 된다. 군에서 받은 초빙강연을 필두로, 이제야 자기계발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감상은, 이대로 살면 안되겠구나. 남들과 똑같이 살며 남들과 경쟁해왔다. 무한 경쟁은 상식이 만드는 것이오, 수많은 승리와 패배가 겹치어 만들어진 빅데이터 속에서 나온 것이니까. 패배는 승리보다 많다.


 군에서는 보고서를 잘 썼다. 간결하게만 쓰면 되니, 본질과 핵심을 담기만 하면 되니 술술술술 잘 써진 편이다. 타 간부들에 비해 수정할거리도 적었다. 그냥 그렇게 일 잘하는 장교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었다. 

마음고생을 종종 하는 편이었었다. 깨닫기 전까지- 그럴적이면 종종 일기를 썼다. 전두엽에 있는 도덕과 상식이라는 필터를 해제하고,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내 진심을 알기 위해 그때 든 감정들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종이 위로 단어들을 내던지고 또 내던진 적이 있다. 마음속의 독백이나 고민보다도 후련했다. 이를테면 글은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제가 되기도 했다.


글은 늘상 취미였다. 자만이라기엔 초라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가 가장 재밌다. 그도 그럴것이 온전한 나의 취향이로써니, 자신이 창작한 것보다 재밌는 것 좋아할 것은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그리하야 아이들이 그리 이뻐 보이는 것일까.

 내가 상상한 세계, 내가 원하는 이야기들은 늘상 내 머릿속에 펼쳐지고 있다. 나태라는 악마가 내 안에 깃들었는지 꾸준함이 결여된 나로써는, 완결작이나 단행본이 아직께도 없다. 하지만 메모만큼은, 무수히 많은 장면의 나열들이 있다. 이 메모가 나의 자산이 될까 싶긴하지만 나의 열정은, 

훈련생도 시절에도 밤잠을 설쳐가며 떠오른 아이디어를 적어온 나의 메모들. 지금도 자다가 문득, 벌떡 일어나 적는다. 완전한 욕심. 완전한 소유를 이루었다. 이 부분에서만큼은 절대 미루는 일이 없으니 향후 내 창작의 씨앗이- 파종이- 완료되는 순간 그리고 비가 내리고, 내 심신을 비옥하게 마련한 순간 그 싹을 피우리라.

 그것이 오늘이되길, 올해가 되길 하며 잦은 계획을 써내려가기도 한다.


도전을 강요하거나 종용하는 것은 도전 하는 일 못지 않게 어렵다. 개인의 도전에 비해 책임이 두 배, 세 배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히 한 마디 마무리 해본다면.

 단 한 번 뿐인 인생인거 누가 모르랴. 당신은 단 한 명이다. 본연의 색깔을 찾길 바란다. 


나는 글과 어떤 관계를 맺어오면서 살았는가?

이 질문이 참신했던 것은 나는 글에 대해 의인화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다. 친구와 같이, 정말 오랜기간 나와 함께했으며 또 동경하고, 존경하는. 

아내는 아니고 재밌어할, 잠재력이 있을 이 친구를.

 글에 인격을 부여해, 의인화 최근 돈에 대해 인격을 있다는 듯 다루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시니컬한 이 감성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었다. 손바닥만한 컴퓨터를 온세상 사람이 들고 다니는 세상에서, 돈을 인간 대하듯이 하는, 소설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서만큼은 그러면 안된다. 라는 엄격한 생각을 하면서도. 팔리는데는 이유가 있으며 어딘가 마음이 끌리는 저도 모르게 공감을 이끌어내는 글들은 이유가 있을거라 끝없이 탐구하고 나름의 생각을 펼쳐가 논리를 구성해본 결과. 

 돈이 곧 사람이다. 사람은 돈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돈은 사람이다. 이 말에 대한 답은, 돈이란 완벽하게 인간관계를 결정해주는, 인간의 손에서 태어난, 자연계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자연계는 인간의 모든 활동을 포함하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우린 인간계와 자연계를 구분하기 마련이다. 자연계 속에 인간계가 포함되는 것을 종종 잊곤 한다.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 즉 환경에 치이며 살기 마련이다. 돈은 환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에 불과하다. 다만 그 안에서의 약육강식이 벌어진다. 마치 프랙탈 같다. 그래서 돈이 왜 사람이냐고? 사람 손에서 만들어져 사람 손에서 이용된다. 돈의 본질은 거래다. 한 사람이 가진 재화를 교환하는데 쓰이는 공통된 약속이며, 그 재화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 혹은 어떤 이의 시간을 거래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니 사람 의지가 녹아들어 있고 누군가의 정성이, 누군가의 호의가, 누군가의 마음이 깃들어 있을 수 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그 돈은 멈추게 된다. 이를 경제적이고 과학적으로 다시 말하자면 소비심리가 된다. 사회 생활에서 사람의 마음이 최소한 거래영역에서는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요즘 인플루언서들, 연예인들, 타고난 장사꾼들을 보면 사람 마음을 잘 훔친다. 원체 매력둥이들이다. 그만큼 돈을 잘 벌어들인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직관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또는 전혀 모르더라도, 사람이, 돈이 꼬일 상인 것이다.


 피가 묻은 돈은 혐오와 위협, 즐거움이 묻은 돈, 배려와 존중이 묻은 돈, 사랑이 묻은 돈, 코 묻은 돈에는 순수와 위선이. 돈과 함께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큰 돈이란 개선과 발전의 몫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뇌를 만족시키던지. 시간을 투자하여 얻고 싶은 것들. 돈 하나에만 집중할수록 협소해진다. 물론 돈이 필요하다는 것에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돈이 최고인 줄 아니까, 돈을 돈으로 볼 줄 모르고 돈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 본질을 볼 줄 모르니, 세상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 둘 지나쳐 보내며 본인마저도. 인간의 평균치인 돈. 돈처럼, 닳고 무뎌지는 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세상 단 하나의 나를 만들어가라. 돈은 알아서 따라온다. 돈도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좇으므로. 


생각의 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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